기세등등한 햇살이 꼬리를 감추는 6월 해거름, 고창읍성 곁 한옥마을 마당에 도리화(桃李花) 소리, 소리 꽃이 피었다. 판소리 여섯마당을 글로 가다듬은 동리 신재효 선생과 우리나라 첫 여류명창 진채선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는 무대다. 신재효 선생의 도리화가(桃李花歌)를 모티브로, ‘도리화 귀경가세’ 연희마당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창이라는 문화 토양에서 자란 농악(풍물)을 바탕에 두고, 탈춤, 소리, 기악, 인형극 등 우리 전통 연희의 거의 모든 장르가 흥겨운 협주를 빚어냈다. 다채롭게 피어나는 소리를 푸지게 품는 것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농악, 고창농악이다. 그 한가운데 고창농악보존회가 있다.
△먹고 놀고 자게 하는 고창농악의 힘
“먹·놀·자프로젝트라고 해요. 지역의 것을 먹고, 지역에서 놀고, 잠자게 하자는 프로젝트죠.”
고창농악보존회 이명훈(48세) 회장이 4년만에 확연히 달라진 무대 ‘밖’을 이야기한다. 한옥자원활용사업을 통해 고창 바깥 사람들에게 지역의 다양한 먹을거리, 놀거리, 체험거리, 잠잘거리를 연계하고 그 정점에 고창의 문화와 예술, 고창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무대를 놓는 시도다. 그러다 자칫 농악의 농익은 맛과 흥이 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일었다.
“고창농악 하나만 가지고 25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고창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4반세기를 붙들어온 고창농악 힘은 다른 장르의 다양한 힘을 품을 만큼 무르익었단다.
고창농악보존회가 국악예술단 ‘고창’과 함께 고대하며 기다려온 무대, 3개월 준비 끝에 지난 5월30일 첫 무대를 열었다. “농악의 진일보한 형태다!”, “일단 재밌다!” 등으로 반응은 생각했던 것 이상 컸다. 지역마다 수천 년 쌓아온 이야기가 가진 근본적인 힘이 어떤 새로운 힘과 만나느냐였다. 이제 두 번째 공연, 앞으로 9월까지 갈 길이 멀다. 9월 넘어 앞으로 10년 100년, 갈 길의 추이는 ‘매우 맑음’이다. 그동안 고창농악이 걸어온 옛길을 더듬는 것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고창에서 찾은 ‘굿의 신천지’
고창농악보존회의 자취는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훈 회장의 귀향으로부터다. 그가 대학풍물패에서 굿을 배우러 전국을 떠돌면서 부터다. 그리고 그가 돌아본 그의 고향 고창의 ‘굿(농악)’, 이기화 전 문화원장과 만남, 황규언 선생과 만남으로부터다.
“아, 대한민국 어디서도 아닌, 내 고향에서 굿의 신천지를 만났어요.”
겨우 한 두 명이 명맥을 이어가는 줄 알았던 고창 굿이 아니었다. 벌써 1980년대 중반부터 농악대를 만들어 40명이 악기마다 빼어난 실력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 회장은 고향의 소리를 몸으로 몸으로 터득하기 시작했다. 몸이 늦을새라 고창농악의 연행과정을 녹음하고 녹취하는 자료정리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창농악의 거대한 아카이브. 이 일에 함께한 고창농악 이수자들이 지금은 고창농악의 든든한 바탕이다. 이들이 30~40대가 되는 동안, 황규언 선생을 비롯한 60~70대 고창농악 연행자들은 이제는 거의 고인이 되었다.
△15년만에 짓는 새집
“그동안 정말 갑갑했어요. 이제 15년만에 집이 지어지는 거예요.”
지난 2000년 옛 폐교에 남루하나마 전수관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15년, 전수관 10여명 식구들과 고창의 수백 고창굿 연희자들, 나아가 전국의 수만 고창굿 전수생에게 번듯한 공간이 조성되는 것이다. 25년 동안 고창 선배 연행자들에게 시시콜콜 배운 몸짓 소리짓이, 고창굿을 엮은 여러 권의 책과 수백의 자료가, 이들의 몸에서 언젠가 솟구칠 공간을 기다리며 그 갑갑한 시간을 잘도 버티었다. 전수와 공연의 장으로 쓰일 공간이 마련된다. 이제 지어지는 새집과 고창굿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는 숙제다.
이 과제는 비단 고창농악보존회만의 것은 아니다. 고창 사람 모두의 몫이다.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공간에 걸맞는 인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창에서 대한민국으로 세계로 굿의 향방을 어떻게 건강하게 구현할 것인가, 고민하는 단위가 달라졌을 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굿치는 마을, 굿마을의 새로운 꿈
집이 지어지는 마당에, 이명훈 회장에게는 숙제같은 꿈이 하나 더 있다. 굿치는 마을, 굿마을이다. 굿이야말로 마을에서 사람들로부터 피어나던 것이다. 누구네 정지(부엌)에서 누구네 시암(샘)에서 누구네 장꽝(장독대)은 물론이고 당산마당에서, 논과 밭(풍장굿)에서 신명나게 피어나던 것이었으니.
이제 굿 공부하는 알맹이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그 가까이 보존회 젊은 가족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고, 차차 예술가, 문인, 연희전문가가 모일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같이 모여 소리공부하는 마을이 될 것이다. 그러다 ‘굿과소리작은도서관’도 생 다양한 문화인프라들이 모여들면 된다. 이 때쯤이면 지금 고창읍성 한옥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먹·놀·자프로젝트’로 확장하는 시도가 굿마을에서 고스란히 구현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 일어나는 풍류의 부흥
“신재효 선생의 동리정사에는 시시때때로 전국에서 연희자들이 모여 가객으로 살았답니다. 고창의 품이 그만치 넓고 깊었기 때문이죠.”
이명훈 회장은 신재효 선생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창의 풍류는 고창의 여러 중부자들이 자신들의 후원으로 소리를 품어 고창의 흥으로 키워낸 것이라 한다. 고창사람들의 넉넉한 품에서 연희자들을 먹이고 재워 세상으로 펼쳐놓은 것이다.
지금 그 부흥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다. 고창풍류의 부흥, 이제 시작이다. 그 옛날 조선을 풍미하던 힘이, 100년도 훨씬 지나 이 땅에서 다시 길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