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출신 한국 불교계 거목 석전 스님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고전소설 속 주인공이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부각되면서 빚어진 논쟁이었다. 지역 간 연고권 주장은 소모적인 논쟁이라 치부할 수도 없다. 문화콘텐츠 발굴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내 고장 인물 발굴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총성 없는 전쟁을 하는 지역의 문화콘텐츠 발굴은 어느 지역이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대세가 결정 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인물 발굴은 중요한 문화콘텐츠다.
예향이라 불리는 전라북도는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시대를 앞선 선각자들이 많은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뛰어난 정치인도 많지만 종교 사상가,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러나 훌륭한 인물이지만 주목받지 못한 분들도 많아 지금부터라도 전북의 인물 찾기에 나설 때다.
그중에 한 분이 석전 박한영 스님이다. 석전 스님은 1870년 완주군 삼례읍 조사마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불교를 지켰던 한국불교계의 거목이다. 조선불교 교정(종정)을 두 번이나 역임한 당시 불교계의 일인자였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의 교장을 지냈다. 당대의 석학인 육당 최남선, 위창 오세창,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를 비롯하여 우리 고장 출신인 가람 이병기 선생과 신석정 시인, 미당 서정주 시인 등이 스님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925년부터 육당 최남선이 석전 선생과 동행해 전주를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답사하여 기록한 〈심춘순례〉에 그분의 행적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리던 육당이 석전을 모시고 쓴 답사기에는 천재도 알지 못하는 처처의 역사와 사상, 불교의 지식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행간이 곳곳에 엿보인다. 50일 동안 〈시대일보〉에 발표한 글을 모아 단행본으로 엮은 〈심춘순례〉의 서문에 육당은 “이 작은 글을 영호당 석전 대사께 드리나이다.”고 헌시를 쓴 걸 보면 얼마나 석전 스님에게 의지해 글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우리 고장 곳곳에도 석전 스님의 흔적이 묻혀 있다. 완주 태조암에서 시작해 모악산 수왕사, 순창 구암사, 정읍 내장사 등 발길 닿는 곳에는 그분의 행적과 기록이 내려온다. 전북을 넘어 한국 사상계의 큰 획을 그었던 석전 스님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조명되어왔을 뿐이다. 다행히 최근 석전을 조명하는 학술사업이 펼쳐지고 있고 스님의 일대기를 동국사 종걸 스님이 펴낸다고 하니 기쁜 일이다.
학술연구 등 선양사업 미흡 아쉬워
지자체마다 고장의 인물을 선양하는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에 정작 불세출의 선각자인 석전 선생의 고향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어느 지역에 가면 생존한 인물의 생가도 잘 보존하고 있는데 석전 스님의 생가는 이정표조차 없으니 쓸쓸하기만 하다.
훌륭한 인물의 발굴은 그분의 삶의 궤적과 업적을 후대가 본받아 살아가는 지표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전북의 인물을 찾고 발굴된 인물의 선양에 나설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