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감기] '정상·비정상' 차이가 금줄 하나에 걸려있다면

모두 극한의 공포 빠져있을 때 "거기 누구세요?" 하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금줄을 쳤다. 아이를 낳았거나, 치성을 드릴 때, 동제(洞祭) 시에. 부정(不淨)한 것을 금기(禁忌)한다는 뜻으로 대문·길 어귀·신목(神木)·장독 등에 왼 새끼를 꼬아 걸쳐놓았다.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부정(不淨)에 노출된 사람은 출입을 삼가야 했다. 부정에 노출된 사람이란 초상집에 갔다 온 사람, 상여를 본 사람, 동물을 죽였거나 사체를 본 사람, 병자·거지·백정 등을 말한다. 어느 낯선 사람이 이 줄을 건들기라도 하면 마을 사람이 모두 나와 일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기도 하였다.

 

영화 <감기> 를 다시 보는데, 자꾸 금줄이 보이는 것이다. 아스팔트 위의 황색 횡선, 바리케이드, 철조망, 플래카드 등. 금줄은 내 머릿속을 휘젓고 나와 다시 뱅그르르 돌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 금줄은 내가 아는 금줄과 성격이 달랐다. 안에 있는 사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용도였다. 전의 것은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목적이었는데……. 금줄 밖은 텅 빈도로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매일 다니던 길인데, 상황이 바뀌었다고 길까지도 저렇게 생경할 줄이야. 그러나 저 길은 그냥 길이 아니다. 생명의 길인 것이다. 저 길에 나서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금줄 안에 있는 한 누구라도 정상이라 할 수 없다. 막는 이 누구인가. 의사? 아니다. 엉뚱하게도 그곳은 미군의 작전 통제지역이 되어있다. 누구든지 황색 라인을 넘으면 사격하라고 미군 지휘관이 지시한다. 금줄은 사선이 되어버렸다.

 

카메라가 시내 전역을 비춘다. 인권이 말살되고, 언로가 막힌 도시는 어둡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주검이 비닐에 싸여 길 건너로 던져진다. 아비규환이다.

 

영화는 조류 인플루엔자 H5N1이 사람에게 감염되는 상황을 그린다. 호흡만으로도 빠르게 전염되는 바이러스로 탈바꿈한 것으로. 이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홍콩발 밀항선에 탄 사람들이 들여왔다. 기침, 홍반, 고열 등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이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도시 하나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가 떠오른다. 영화는 영문 모를 전염성 물질로 인해 사람들 눈이 하나둘 멀어 가는 상황을 그린다. 눈먼 자들 앞에 보이는 세상은 희뿌옇다. 눈이 안 보이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더욱이 전기, 가스, 수도 등 모든 것이 끊어졌는데……. 수용소에는 안과의사도 와있다. 먹고, 싸고, 비명 지르고, 자고.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은 본능 안에서 절규한다. 그 가운데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의사 부인(줄리안 무어 분)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지내며 질서유지를 돕는다. 그런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들의 일원일 뿐. 우여곡절 끝에 사람들의 시력이 회복 되기 시작한다. 몇 사람이 의사 집에 모인다. 쾌재를 부를 법도 하지만 모두 의연하다. 의사 부인이 베란다로 나가서 밖을 내다본다. 세상이 희뿌옇다.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아름다운 도시 풍경이 눈앞에 한가득 펼쳐진다. 영화가 묻는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안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고. 또 그 경계는 무엇이냐고.

 

‘존 엔들러’는 아마존 강에 서식하는 ‘구피’라는 물고기를 처음 연구한 학자로 알려졌다. 그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폭포아래 사는 구피는 색이 밋밋하지만 폭포 위에 사는 구피는 색이 아주 화려했다. 알고 보니 폭포 아래에는 구피를 잡아먹는 ‘파이크 시클리드’라는 사나운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생존에 걱정이 없는 폭포 위 구피는 번식을 위한 몸가짐에 열중이었고, 아래 구피는 보호색으로 몸을 바꾸기에 급급하였다. 엔들러 교수의 이 실험은 파이크 시클리드라는 위협적인 존재가 생태계에서 다른 개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뜻 깊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독감, 사스, 신종플루, 에볼라, 메르스까지.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바이러스와 직·간접적으로 싸워왔다. 대변이, 소변이로 인한 감염의 고비 또한 수없이 넘기며 지내왔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바이러스를 퇴치할 완전한 방법은 아직 없는 듯 보인다.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어디가 폭포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가. 그 경계는 무엇이며 금줄은 누가 긋는가.

 

영화는 119 구조대원으로 일하는 ‘지구’와 ‘경업’ 같이 살신성인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기만 살겠다고 온갖 추태 다 부리는 많은 사람을 비집고 묵묵히 구조 활동에 임하는 사람 말이다.

 

“거기 누구세요?” 이 얼마나 감미로운 목소리인가. 한편 위험에 노출된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 신호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감염된 어린아이 ‘미르’는 휴대전화가 내보내는 음악 소리가 있었기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사체 더미 속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극한상황 일수록 인간애(人間愛)의 발현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시민 모두가 함께 금줄을 걷어낼 수 있는 계책 아닐까.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