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지에는 <한여름의 판타지아> 라는 한·일 합작영화를 만났다. 판타지란 말에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영화를 열었다. 영화는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영화감독 ‘태훈’(임형국 분)의 여름날 단상을 담고 있다. 무대는 일본의 지방 소도시인 고조 시(市)다. 그는 조감독 ‘박미정’(김새벽)과 함께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러 이곳에 간다. 둘은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간혹 눈에 띄는 ‘시노하라’라는 마을에서 흘러간 세월과 만난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에서는 그들의 하얀 기억을 복원하려는 듯 흑백으로 처리하여 깊이를 더해준다. 한여름의>
주점을 운영하는 노부부는 장사가 잘 되던 때와 쇠락한 지금을 비교하며 씁쓸해한다. 시청 공무원인 ‘유스케’는 한때 배우가 꿈이었다며 극단생활 이야기에 열을 올리더니, 안정적인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고 힘없이 말한다. 마을을 안내하는 ‘겐지’의 첫사랑은 ‘요시코’다. 오사카에서 일할 때 만난 술집 종업원이 그녀를 닮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며 첫사랑을 그리워한다. 한 폐교에 들른 태훈은 학교 복도에서 겐지가 나오는 단체 사진을 발견한다. 사진 한 곳을 주시하는데 수줍게 앉아있는 한 소녀가 보인다. 요시코임을 직감하지만, 설명은 이어지지 않는다.
2부가 시작되면 화면이 총천연색으로 바뀐다. 한국에서 혼자 여행 온 ‘혜정’(김새벽 분)이 여행 안내소에서 감을 재배하는 청년 ‘유스케’(이와세 료 분)를 만난다. 혜정은 영화배우다. 그녀 또한 이곳에 헌팅 온 듯 보인다. 태훈은 기억을 집으러, 혜정은 기억을 만들러 왔다는 생각이 든다. 유스케와 혜정은 말린 감 이야기 하며 이곳 사람들의 생활상 그리고 관광안내 등 지루하리 만큼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들이 걷는 골목길은 어디를 가도 텅 비어있다. 둘 사이의 틈은 이야기로, 텅 빈 길은 이들의 발자국으로 메우려는 시도일까. 가로등 불빛 여러 개가 길게 교차하면서 그림자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둘은 찻집에 들어간다. 다시 시작된 감 이야기가 지루하다 싶을 무렵 유스케가 자세를 바꾸고 말한다. “남자친구 있어요?” 혜정이 즉각 답한다. “예!” 한참 후 둘은 다시 거리로 나선다. 유스케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한국 가면 안내 해 줄래요?” 망설이던 혜정이 답한다. “예!” 전화번호를 적기 위해 혜정이 유스케의 팔을 잡는다. 맨살 위에 전화번호가 씌어 진다. 유스케가 혜정을 와락 껴안는다.
태훈과 혜정의 여정은 그렇게 끝난다. 1부의 태훈, 2부의 혜정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 고조 시 하늘에서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감독의 판타지는 지나간 시간을 불러내고, 노인들의 회한과 만나고, 이글거리는 태양과 싱그러운 초록 사이로 흔들리는 나무들이 있는 세상에 머문다. 소녀가 처음 칠한 립스틱 색상 같은 석양, 이내 밤이 오면 이야기는 정점에 이른다. 감독은 2부를 시나리오 없이 촬영했다고 한다. 낯선 곳, 낯선 이야기는 그래서 더 신비롭다. 여기서 불꽃은 내면의 튀는 기운임과 동시 판타지의 화려한 실체 아닌가 싶다. 꽃처럼 피었다가 금방 사그라지는 불꽃놀이는 판타지가 찰나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고.
사람은 항상 판타지를 꿈꾼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판타지. 영화는 이를 꼭 잡고 싶으면 여행을 떠나라고 말한다. 헌팅을 하라고 권한다. 그것은 순감임을 잊지 말라며.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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