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란 말, 언어도단이다

▲ 소재호 시인·석정문학관장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언어 중에는 그 본래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왜곡해 쓰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감기가 들어 약국에 가서 ‘감기 낫는 약’ 달라고 해야 하는데 ‘감기 드는 약’달라는 꼴이 된 경우가 이와 같다. ‘배 아픈 약’도 마찮가지 예이다.이런 상황의 역설법은, 약을 파는 약사나 약을 구매하는 사람 상호간에 소통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비인도적 행위에 반성 없는 일본

 

그런데 저 위안부(慰安婦)란 말의 반어법은 도대체 수궁이 전혀 가지 않는다. 오히려 황당하기까지 하다. 위안이란 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위로하여 편안하게 함’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위안부란 말을 자구적으로만 해석해 보면, 우리 조선의 순박한 소녀들이 스스로 희망해 성전을 치루는 일본군에 종군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성적 봉사를 했다고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니 이런 황당무계한 말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위안부란 말은 그들 일본군 가해자들이 상용하는 말이지 피해자인 우리 입에 담을 말이 전혀 아닌 성 싶은 것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설득의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결국 설득되고 양해되어서 자의로 모집에 응해 스스로 그 위안부란 대열에 끼게 되고 이후 일본군 전장에 따라 다니며 그들에게 성적 쾌감을 제공해 전쟁 중에 겪는 피로감을 해소시켜 주는 임무를 띤 여자들이라고. 관권으로 모집한 게 아니라 민간 업체가 모집해서 성매매를 한 것 뿐이라고. 적정한 보수도 지불했노라고 하는 등등 철면피한 주장을 늘어 놓는다. 그러니 사과나 보상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지금껏 버틴다. 어느 나라나 전쟁을 치루는 국가는 이런 일을 하는 게 비일비재한 사실이라고까지 지껄인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실제는 정반대의 논리가 아닌가? 패악한 일제의 관권으로 강제 징발되어, 말하자면 짐승 포획하듯이 납치돼 끌려가 짐승 우리같은 곳에 가두고 그들의 성만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소위 성노예가 아니었던가? 끌려간 우리네 소녀들은 겨우 나이 14세 전후로 성의 개념도 모르는 순수 순박한 소녀들이었다. 대략 16만명이라고도 집계됐다. 하루에 당하는 성 수모는 몇 십 번에 이른다니 가공할 정경이 아닌가? 저러한 비인도적 행위를 기탄없이 자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은 커녕 비겁한 논리로 일관하는 양을 보노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치졸한 나라이고 그런 국민이 아닌가 하고 역겨워진다.아베를 비롯한 일본 정치 모리배들은 사과 한 마디에도 인색하므로 그들에게 분노가 삭지 않는다. 독일 수상 메르켈을 비롯한 그들 국민들은 사죄의 태도가 진정한 양심에 바탕을 두고 이에 사과와 보상에 임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메르켈은 일본 정부를 향해 진정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안겨준 피해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심대했다. 고려 말엽부터 왜구 침입은 연년세세 무슨 정례 행사나 다름 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삼남을 휩쓸었다고 했다. 삼남이란 전라, 중청, 경상 전역을 말함이니 그들 횡포가 어떠한지 상상을 초월한다. 약탈, 살육, 방화, 강간 등 못된 짓은 모두 골라 저질렀던 것이다. 일본은 통채로 해적국이었다. 이런 일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자행됐다. 우리가 편의상 임진·병자 양난과 근세 41년의 식민 통치만을 일컬고 있음은 다 말하기에 너무 많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일본 패군 강집 성노예'로 불러야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경계심을 풀고 이러저러한 마음 가다듬는 자세를 이완시키고 있음에 두려워진 것이다. 위안부란 말도 언어도단이며 그 용어도 바꿔야 마땅한 것이다. 왜인이 하는 말을 그대로 우리 입에 올려 쓴다니 정말 자괴심이 인다. 패망한 ‘일본 패군 강집 성노예’쯤으로 용어가 바뀌어야 한다. 저주해도 부족할 터에 위로라니 당치도 않는 말이다. 전주에서도 ‘소녀상’을 세운다 하니 만분의 일일망정 우리 마음에 자위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