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각박해져가는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기란 그리 말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먹고 사는 일만 문제없다면 다시 말해 직업상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리운 산하와 정다운 벗들, 일가친지들이 반겨주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련만….
대도시 삶 정리하고 고향 농촌으로
고향 좋은 줄이야 누가 모르고 그 누군들 고향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현실적 삶의 제약들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흔을 넘기고 쉰을 넘어 예순이 내일모레인데도 여전히 해결난망의 여러 사안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그저 추석, 설날, 휴가 때에나 한 번 들러 고향을 지키는 어른들과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1989년 가을 어느 날, ‘아버지 계시는 함양으로 가서 살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아내와 상의한 뒤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1학년 딸을 데리고 이삿짐을 꾸려 트럭에 실은 뒤 함양으로 돌아온 지도 어언 19년이 되었다. 처음에 아내와의 귀향에 관한 합의가 원만하게 되지 않아 ‘정 그렇다면 3년 정도 살아보고 함양서 살 것인지 서울서 살 것인 지 그때 결정하자’고 제의하여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는 동의를 받아냈던 일이 생각난다.
1981년 12월에도 한 차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함양으로 돌아와 1년 반 살다가 준비 부족으로 생계가 어려워져 1983년 여름 또다시 서울로 돌아가 한 동안 라면과 소주로 끼니를 때우고 사무실 책상에서 잠을 해결하는 등 고생을 자심하게 했던 쓰라린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그때는 아예 함양에 직접 회사를 설립하여 생업 기반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내려왔었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소리 높여 부르며 낙향을 재촉했던 도연명 선생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본의 아니게 두 번 부르게 되었다. 귀거래사는 잘 아시다시피 중국 동진(東晋)의 도연명 선생께서 당시 월급으로 받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었던 상급 관리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그 자리에서 관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읊었던 유명한 노래 가사이다.
필자의 19년 전 얘기를 들먹이며 대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내는 것은 우리네 삶의 환경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고 있어서 도시농촌간의 격차가 예전 같지도 않을 뿐더러 교육, 문화, 교통 등 여러 가지 여건의 변화로 인해 이제는 귀거래사를 읊을 시기가 어느 정도 성숙됐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아닐지라도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현상은 나라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나 지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여간 고무적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고향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고향을 떠난 지 50년 만에 화려하게 컴백한 천사령 함양군수의 예는 성공적 귀향의 대표적인 사례로도 손꼽힐만하다. ‘돌아오는 함양’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들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고, 부농 100가구와 백세이상 장수자 100명이 넘는 이상향 건설 목표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주변 지자체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귀향·귀촌 국가 균형발전에도 도움
이제 함양을 비롯한 농촌은 먹고살기 위해 또는 더 나은 교육과 문화생활 등 삶의 질을 찾아 등지고 떠나야 할 고향이 아니라 돌아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만한 그런 풍요로운 고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 드리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