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서동선화축제

어린 시절 마(麻)를 팔아 연명했던 서동이 왕위(백제 무왕)에 오르게 된 결정적 요인은 선화공주와의 결혼이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은 마를 주면서 사귄 서라벌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네.” 시집도 가기 전에 사통(私通)한 공주를 신하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내치라는 요구가 격렬하자 진평왕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면서 그녀를 귀양보냈다. 이때 서동이 호위를 자청했다. 공주는 마음이 끌려 이를 허락했다. 남몰래 관계를 맺은 후에야 그가 서동이란 사실을 알게 됐고 노래말이 맞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내용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선화공주는 과연 신라 진흥왕의 딸인가. 백제 왕자 서동이 신라 서라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게 맞는 말인가.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선화공주는 익산지역 토호의 딸이었다. 서동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역은 신라 수도 서라벌이 아니라 선화공주의 친정인 익산이었다. 혈통은 왕자지만 몰락한 서동을 도와 임금(무왕)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자신의 친정인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고 도읍까지 옮겨 백제의 권력축을 이동하려 했다.”( ‘그 위대한 전쟁’)

 

당시 백제는 전쟁에서 패해 허약했다. 왕족인 서동이 마를 팔았다는 것이 백제 왕실의 처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신라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성왕이 신라 진흥왕에 의해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는 원수지간이 됐다. 무왕이 재위 42년 동안 13차례나 신라와 공방을 벌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무왕과 진평왕이 장인과 사위의 관계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세기의 로맨스’로 잘 알려져 있다. 설화로서의 가치도 있고 스토리텔링의 좋은 소재다. 없던 것도 만들어 내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서동선화축제 개최를 놓고 시끄럽다. 익산시와 축제제전위가 저마다 10월 중 제각각 축제를 열겠다고 밝혔다. 축제 하나 의견조율을 못하고 있다. 마침 백제역사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관광객이 두배로 늘고 있다. 인프라 구축에 힘을 합해야 할 때다. 지역발전의 호기다. 이런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티격태격 하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익산지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자성해야 할 일이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