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서 추사 김정희 귀양길 흔적 찾다

고창향토연구회, 글씨 11점 공개 / 서정태 시인도 관련 일화 증언 / 군, '추사 길' 개설 콘텐츠 개발로

▲ 주련 적향강파동성두(謫向江波動星斗)의 첫 단어가 귀양을 뜻하는 ‘적향’이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가 제주도 귀양길에 고창을 경유한 흔적들이 정리돼 공개됐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추사의 유배 행로 중 그동안 불분명했던 전주~나주간 행로가 고창에서의 흔적을 통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고창향토문화연구회(회장 오강석)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추사의 고창 행로를 보여주는 다량의 주련(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 붙인 글)과 관련 증언을 공개했다.

 

고창군 아산면 반암마을의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에 현재 남아 있는 추사의 주련은 11점. 그 중 ‘자첨문장세희유(子瞻文章世希有 소동파의 문장은 세상에 희귀한데) 적향강파동성두(謫向江波動星斗 귀양 갈 땐 물결 따라 별들도 흔들렸지)’이 추사의 귀양길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동석한 공주대 백원철 명예교수는 “이 주련은 자신을 소동파에 견준 추사의 학문적 자부심과 멀리 귀양길에 오른 착잡한 심정이 다드러나 있다”며, 특히 ‘적향(謫向)’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쓴 것으로 보아 귀양 중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풀이했다.

 

또 추사가 쓴 ‘상선암(상선암(上仙巖)’에 나오는 시 ‘행행모전봉회처(行行路轉峯廻處 한 가닥 맑은 샘물 천상에서 흘러오네) 일도청천천상래(一道淸泉天上來 걷고 또 걸으니 길은 굽고 산봉우리 돌아드는 곳)’는 이 마을의 풍광과도 잘 어울리는 구절로 백 교수는 해석했다.

▲ 주련이 걸려 있는 반암마을 울산김씨 제각.

추사의 글씨 외에 관련 증언도 나왔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생으로, 현재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에서 살고 있는 서정태 시인(93)은 추사가 그곳에서 유숙했던 집안의 이야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서 시인이 13세 때 하오산마을에 사는 친구 이동필의 집에 갔다가 동필의 할아버지(이문술)로부터 추사와 관련된 일화를 듣고 추사의 병풍을 직접 보았단다. 이와 관련해 전주이씨 집안 후손인 이춘헌(78) 씨는 선친이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집안 대대로 물려온 가보인 추사의 병풍을 자신의 대에 잃어버린 것이 가슴 아프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추사가 이씨의 선대에게 병풍 작품을 준 일화도 서 시인이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왕실의 종친으로 병조판서·도승지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문술은 추사의 도착기일에 맞춰 소를 잡아 육포를 떠서 유배 길에 먹을 수 있게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이를 고맙게 여긴 추사가 병풍을 줘 가보로 전해오다 6.25전쟁때 소실했다는 것이다.

 

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는 “추사가 죄인이었기에 객사에 재울 수 없어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지방수령들이 대부분 유숙할 곳을 마련줬다”고 이문술 집에 유숙할 수 있었던 배경을 뒷받침했다.

 

반암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선운사에 남아 있는 ‘백파율사비’(전북유형문화재 제122호) 또한 백파와 친분이 있던 추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선운사에 들렀을 것으로 연구회는 추정했다.

 

고창 출신의 진동규 시인은 “추사가 행선지인 나주~해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장 동헌을 들렀을 것이며, 무장 동헌에 있던 오래된 소나무를 보고 후일 제주도 유배 중에 ‘세한도’를 그리는 데 영감을 줬을 수도 있다”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연구회는 이 같은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추사가 흥덕현 부안 하오산~반암마을(병바위)~선운사~무장현을 거쳐 전남 장성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추사 금석문연구가인 이용엽 씨는 “전북 지역에는 추사체의 진수로 꼽히는 백파율사비를 비롯해 추사의 금석문이 7개나 남아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으며, 특히 이번 고창지역에서 발굴된 추사 중기의 글들로 인해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또 해마다 많은 서예가와 역사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추사의 자취를 조명하는 역사문화탐방에 나서고 있고 추사가 지나간 고창지역의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점을 고려, 고창군이 ‘추사의 길’을 개설하는 등 추사 관련 자료를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면 좋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오강석 고창향토문화연구회장은 “미당 탄생 100년을 기념해 서정태 시인을 인터뷰 하는 과정에서 추사 관련 증언을 듣게 되면서 자료를 수집하게 됐다”며, “향후 미진한 부문은 더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