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이복열 하시마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장 "日, 진정한 사과·징용자 유골 송환을"

피해실태·진상규명 위해 30년 열정 쏟아 / 일본 오가며 사망자 명부·착취 자료 확보 / 강제노역 역사 외면, 세계유산 등재 답답 / 노동자 임금 일부라도 돌려 받아야 마땅

▲ 일제 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실태 규명과 희생자 유골 송환을 위해 30년 동안 노력해 온 이복열 일본 하시마 한국인희생자 유족회장(호원대 명예교수)이 제70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지난 1991년 하시마탄광 강제노역 진상규명 활동을 소개한 일본 신문의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안봉주 기자

“일본은 강제노역에 동원돼 억울하게 운명을 달리한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골 송환과 당시 착취한 노동자 임금 반환을 통해 이제라도 진심어린 사죄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일제 치하 한국인 강제징용 실태 및 진상 규명, 희생자 유골 송환 등을 위해 30년 동안 열정을 쏟아온 이복열 일본 하시마 한국인희생자 유족회장(72·호원대 명예교수)은 제70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마음이 착잡하다.

 

“삼촌이 일본 탄광에 끌려가 노역 중 숨을 거뒀지만 그런 사실조차 몰랐던 할머니는 밤마다 대문 앞에 나가 우두커니 서서 작은 아들이 ‘어머니’하고 부르며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다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해저 탄광에 끌려간 한국인들에게 ‘지옥섬’· ‘감옥섬’으로 불린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端島)는 강제노역의 아픈 역사를 간과한 채 지난달 5일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이란 명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는 커녕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곧바로 태도를 바꿔 한국인(조선인) ‘강제노동’ 사실까지 부인했다.

 

김제 백산면이 고향인 이 회장이 일본인에게조차 생소했던 작은 섬 하시마의 슬픈 역사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은 1943년 스물 한 살의 나이에 강제징용된 삼촌(이완옥 씨)을 기다리다 생을 마감한 할머니에 대한 어릴적 기억이 가슴 속 응어리로 남았기 때문이다.

 

호원대 교수로 재직하던 지난 1986년 삼촌의 자취를 찾아 나선 이 회장은 우선 김제 백산면사무소에서 제적등본을 통해 삼촌이 강제징용 이듬해인 1944년 하시마 탄광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이후 수차례 일본을 오가며 관련 자료를 조사한 끝에 삼촌의 이름이 포함된 122명(한국인 106명)의 하시마탄광 사망자 명부와 일본 기업의 징용 노동자 임금착취 자료를 확보했다. 또 당시 희생자들은 하시마 인근 도서인 다카시마에 있는 사찰(금송사) 납골당에 무연고자 유골로 안치돼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는 일본에서 확보한 한국인 사망자 명부를 토대로 전국에서 유족 50여 가정을 찾아내 1992년 하시마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했다.

 

이 회장의 하시마 강제노역 진상규명 활동은 일본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았다. 강제노역 현장을 찾은 이 회장의 활동상은 매번 요미우리와 아사히신문 등 일본 굴지의 언론에 자세히 소개됐다. 또 지난 1993년에는 아시히신문 기자가 전주까지 찾아와 유족회 결성 사실과 희생자 유골 송환 및 배상 등을 요구하는 이 회장의 목소리를 8월 15일자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이 회장은 “당시 일본 정부나 하시마 탄광을 운영한 미쓰비시 중공업 측이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의 사망 사실을 유족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며 “이제라도 일본은 희생자 유골을 송환하고 당시 착취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부라도 반환,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1950년 작성된 주일 미군 측 자료를 토대로 당시 미쓰비시 등 전범 기업들이 징용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거액(당시 기준 2억3700만엔)의 노임이 1946년 일본 정부에 공탁돼 현재까지 은행에 보관돼 있는 만큼 우리 정부가 당연히 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범 기업들이 공탁한 징용 노동자 임금 문제에 대해 일본은 한·일협정을 통해 이미 마무리됐다고 주장하지만 개인의 임금은 국가간 협정에 포함될 사안이 아니다” 면서 “강제징용 희생자 대일 배상 청구와 노동임금 반환 문제 등을 정치권에 수차례 제기했지만 전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면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에 아쉬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