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이야기 2 - 한벽당

▲ 최맹식 국립무형유산원장
한벽당(寒碧堂)은 조선 500여 년간 전주 선비들이 풍류를 담아냈던 곳이다. 한벽당은 승암산의 한 줄기가 서북쪽으로 크게 낙맥하면서 다시 서편과 서남측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 지맥은 낙맥과 수차례의 방향을 바꾸고, 활처럼 휘인 지세와 물관 만나는 지점이 한벽당이다.

 

조선시대 전주 선비들 풍류 담아낸 곳

 

한벽당은 승암산에서 서북편으로 이여지는 지맥 중, 남측면 경사진 아래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전주천이 북향하다가 크게 방향을 틀어 서향하는 가장 바깥과 맞닿는 곳이다. 이른바 풍수적으로 면배(面背)의 배면에 위치하여 나를 배신하는 곳이다. 일견, 물(전주천)로 보면 나(한벽당을 주인으로 봄)를 배신하듯 등지고 무정하게 흘러가는 모습이다. 더구나 무정하게 흘러가다 못해 북쪽으로부터 이곳으로 유유하게 흘러오는 물은 주인인 한벽당을 때리는 모습까지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만 세밀하게 관찰하면, 지세가 전주천을 따라 크게 활처럼 휘이면서 배면하는 직전의 유정(有情)한 곳이 한벽당 터이다. 또 나와 충돌할 듯 돌진해오는 물의 기세는 한벽당 동편 기둥에서 벗어난 지점을 향하니, 나를 살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벽당 마루의 맨 중심선에서 약1m 위쪽에 혈(穴)이 맺혀 있음이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명당이라는 이야기다. 다만 건물을 짓는 양택혈이 아닌 음택혈이라는 점에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유수한 사찰의 부처님자리도 마땅한 양택혈이 없으면 음택혈의 정확한 혈심에 모시는 경우도 있으니, 한벽당의 격은 지리적으로 이미 격을 갖추고도 남음이 있는 셈이다. 아마도 처음 이 건물을 지을 때 확실하게 눈 밝은이가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형기(주변 지세 등)만을 위주로 하는 학인들은 이 곳의 혈자리를 인정하지 않을 기세가 아닐까.

 

한벽당에 들어오는 혈자리의 기운은 승암산 정상인(해발 약 300m) 중바위 전망대에서 북으로 약 30여m 지점에서 발원한다. 이 용맥은 중바위 전망대를 30여m를 지나와 남동편의 지선을 타고 낙맥하여, 해발 110m까지 내려온다. 이곳에서 다시 작은 봉우리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다가 서편으로 능선을 타고 다시 낙맥하여 남으로 방향을 크게 꺾이면서 혈을 맺은 것이다. 승암산 정상부에서 발원하여 약1.6㎞를 치달아 이곳에 자리를 만들었다.

 

이 혈터는 두 개의 보조 맥선이 존재한다. 동편 보조 용맥은 승암산 정성부의 중바위 남쪽의 265m 지점에서 발원하여 능선을 타고 전주 천변 가까이까지 내려온다. 용맥은 승암교 직전에서 조금씩 경사면을 타고 올라가다가 한벽당의 동편에 이르러 혈로 이어진다. 동편 보조 용맥은 화산 정상의 서북 능선상에서 발원하여 수차의 방향전환과, 전주천을 건너 천변을 타고 달려간다. 서천교에서 곧장 풍남문을 가로질러 오목대의 작은 능선을 타고 치달아 올라 능선의 남쪽 기슭을 횡으로 가로질러 한벽당 혈터로 들어오는 것이다.

 

학문 자긍심 다시 일으키기에 충분

 

한벽당 북편 마루끝에서 1~2m떨어진 지점의 바위에는 인위적으로 홈을 내어 목재를 놓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물 빼는 목적일수도). 추정키로는 아마도 현재 모습의 한벽당의 정확한 위치와 모습은 조금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짐작해봄직하다. 만약 바위에 난 홈 자리에 건물의 목 부재를 놓았다면 마루가 놓인 건물일 경우, 북편은 이 바위에 맞닿은 형태이고, 남쪽은 경사면이기 때문에 높은 기둥이나 현재의 모습처럼 높은 초석을 놓아 들린 마루형태였을지 모르겠다. 따라서 바위에 난 곳에 부재를 놓았을 경우, 지금처럼 혈자리가 북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마루의 중앙에 놓였을 가능성도 있겠다. 누각이나 정자를 막론하고 이렇듯 정확하게 혈자리를 잡아 앉힌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주위의 산이 모두 유정하고, 물과 풍광까지 좋은 곳은 흔하지 않다. 한벽당은 단순한 누각이 아니다. 옛 전주 선비들의 글과 멋을 500여 년간이나 싣고 담아왔던 곳이다. 풍광의 시원함과 주변 지세의 복원에 따른 기운과 실제 혈의 뒷받침에 힘입어 삶과 학문의 자긍심을 다시 일으키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