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탄생 100주년, 문학적 자산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⑤ 친일·군사정권 협력 어떻게 볼 것인가

"해방후 석고대죄 안해 아쉬워"·"문학적 업적 별개로 평가해야" / 가미가제 찬양'오장 마쓰이 송가' 등 10여 편 친일시 / 새마을 운동 홍보·전두환 정권지지 연설 등 오점 남겨 / "친권력적 행보"·"재평가해야" &

▲ 미당 서정주의 동생 서정태 옹(93)이 지난 달 21일 그의 집 우하당에서 미당이 친일시를 쓴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친일 문제는 민족의 큰 숙제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통령 동생인 박근령의 ‘친일망언’, 현직 정치인들 윗대의 친일행적 등이 이슈가 됐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과 독재옹호 역시 여전히 그의 문학세계 전반의 공·과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국민시인’이란 위상에 큰 오점을 남겼으며, 문학적 성과와 맞물려 지금도 진행형의 논란거리다.

 

△1940년대 초 친일시 10여편= 미당의 시적 이력에 친일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와 관련해 밝혀진 시만 해도 10여 편이다. 1942년부터 2년여에 걸쳐 쓰인 작품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매일신보, 1942, 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춘추, 1943, 수필)’, ‘스무살 된 벗에게(조광, 1943, 수필)’, ‘항공일에(국민문학, 1943, 일본어시)’, ‘최제부의 군속지망(조광, 1943, 소설)’, ‘헌시(獻詩)(매일신보, 1943, 시), ‘보도행(조광, 1943, 수필)’, ‘무제(국민문학, 1943, 시)’ ‘오장 마쓰이 송가(매일신보, 1944, 시)’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들은 대부분 최재서의 요청으로 일본말 시 잡지 ‘국민시인’의 편집일을 맡았을 때 쓰였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인씨의 둘째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중략…)/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로 온/ 원수 영미(英美)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미당을 친일 시인으로 낙인찍히게 만든 시, ‘오장 마쓰이 송가’ 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비롯된 태평양 전쟁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4년 12월 9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됐다. 이 시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를 찬미하고 있다. 무모한 전술에 동원된 ‘몸뚱이’도 인 씨성을 가진 엄연한 조선 젊은이의 것이다. 허병식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올 6월 발표한 논문, ‘식민지 주체의 아이덴티티 수행과 친일의 회로’에서 ‘미당의 친일시는 일제에 충성하는 민족의 맨얼굴을 자랑스럽게 전시한다’고 평가했다.

 

미당은 자신의 행보에 대한 평가를 의식했다. 그의 친일행각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고백과 사과는 1960년대 ‘창피한 이야기들’에서 이뤄졌다. 그는 이야기에서 “전쟁세계에 대한 내 무지와 부족한 인식이 빚어낸 이것, 해방되어 돌이켜보니 참 너무나 미안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미당은 1980년대의 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와 1992년 〈신동아〉에 기고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에서 일본이 쉽게 패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자신의 행위가 강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80년대 군사정권 옹호, 친일 행적 연상시켜= 해방 후, 미당은 ‘친(親)권력적’ 행보를 보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1950년~1970년을 거치면서 문단과 매체를 통해 확고한 문학권력으로 부상했고 대학교수라는 제도적 권위까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가 떨어지게 열리는 꽃은/ 겨우내 여기 다 소곤거리던/ 바람의 바람의 소망이리라/ 바다밑 조개들이 붉고 푸른 문의는/ 온 · 철련 에워싸고 출렁거리던/ 물결의 물결의 소망이리라/ 이 거치른 마음의 땅에/ 소나기처럼 오시는 혁명은/ 오랜 민중의 소망이리라”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8월 24일 경향신문에 발표한 시다. 제목은 ‘혁명 찬(讚)’. 서은주 박사(연세대학교 강사)가 지난 해 12월 동국대에서 열린 학술발표회 ‘서정주와 전통주의의 계보’에서 공개했다. 미당은 이 시에서 군사 쿠데타를 “민중의 소망”이 반영된 “혁명”으로 추켜세웠다.

 

미당의 군사정권 옹호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와서도 이어진다.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중략…)/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중략…)/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 하늘의 찬양과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이 시는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56세 생일 축하장에서 발표한 시, ‘처음으로’다. 그는 시에서 당시 삼저호황(198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에 의한 물가안정과 평화의 댐 건설을 전두환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했다. 김학동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그의 글 ‘서정주의 생애와 문학〈서정주 연구〉’에서 “서정주가 보여준 친권력적인 태도는 일제 치하의 친일 행적과 연관시키는 빌미가 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그는 이승만의 전기를 쓰고, 베트남 참전기를 독려하는 시 ‘다시 비정(非情)의 산하(山下)에’를 썼으며, 1975년에는 김종필의 새마을 운동 시찰을 따라다니며 관제용 참관기를 남겼다. 1980년에는 ‘광주’의 비극을 발판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TV연설을 했다.

 

△ ‘권력지향적 태도’비판 잇따라= 미당의 문학과 현실인식에 대한 평가는 그의 타계 이후 언론 논쟁의 양상을 띠기도 했다. 이 논쟁은 미당의 제자였던 고은 시인이 지난 2001년 ‘미당 담론’에서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시대에 대한 고소 공포증에 가까운 굴복’이라고 쓰며 시작됐다. 이에 대해 송하선 우석대 명예교수는 ‘“미당담론”에 대한 담론’에서 ‘돌아가신 스승의 뒤통수에 대고 돌을 던지는 그림은, 상상하기조차 힘들고 안타깝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미당의 문학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전면적 논쟁이었던 셈이다.

 

현재도 미당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논자들은 미당의 삶과 문학이 세계관을 통해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서은주 박사는 “미당은 친일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권력지향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며 “당시에 존재했던 ‘절대권력’의 외압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겠지만, 기본적으로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인의 삶과 작품이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미당의 친일은 보통사람과의 친일과는 다르다” 며 “적어도 문단에 영향력이 큰 지식인이라면 도의적인 책임을 피해갈 순 없다. 해방 후 석고대죄하는 모습이라도 보였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조교현 광복회 전북지부 사무국장은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친일에 썼다는 거 자체가 문제다” 면서도 “서정주에 대한 판단은 대중들에게 맡길 필요도 있다”며 판단을 유보했다.

 

△친일과 독재옹호는 반면교사하고, ‘시 자체’로 평가받아야= 미당에 대해 일정정도 우호적인 관점을 가진 논자들은 친일·독재옹호와 문학적 업적은 별개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김동수 미당문학회 회장은 “예술은 이념적인 잣대나 가치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며 “친일시 몇 편으로 명확한 근거 없이 서정주의 다른 작품들마저 ‘친일 정신’이 반영돼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복잡한 식민지 상황을 인지하고, 서정주의 행동이 친일(親日)이었는지 순일(順日)이었는지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 윤재웅 교수는 “미당 서정주의 친일행적 및 독재정권 협조는 그의 문학성과는 별개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윤재웅 동국대학교 교수는 “미당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행보를 단죄적 시각으로 바라보기엔, 여러 복잡한 함수들이 존재한다” 며 “그의 친일행적 및 독재정권 협조는 문학성과는 별개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미당을 위한 동생 서정태 시인의 변론= 미당의 동생 서정태 시인은 일제시기를 살아 본 사람의 입장에서 미당을 평가한다. 가족의 입장이 아닌 시인의 입장에서 얘기한다는 사실 역시 강조한다. 서정태 옹은 “형님은 1944년 고창 경찰서에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연극단원들의 사상적 배후혐의로 구금됐었다” 며 “당시에 큰 고초를 겪었는데,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고 말했다. 서 시인은 이어 “시대적 상황이 어땠는지 고려해 볼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두환을 찬양한 시에 관해서는 “형님의 큰 과오라고 생각한다” 면서도 장세동 전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장세동이가 형님에게 전두환 찬양을 부탁하면서, 거의 형님집에서 살다시피 했다”며 “어쩔 수 없이 찬양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