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탄생 100주년, 문학적 자산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⑧ 미당을 말하다

서지월 시인 "문학 자부심 높아…친일 비판에 섭섭해 하기도"

▲ 미당 서정주 시인이 ‘동천(冬天)’을 서지월 시인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서지월 시인에 따르면 미당이 83세 되던 해 남현동 집(봉산산방)에서 직접 받았다. 서 시인은 “미당 선생님과 장 시간 담소를 나누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는 데 선생님께서 ‘자네 말이야 내가 시를 하나 써주지 어느 시가 좋겠노?’라고 하셨다. 나는 ‘동천이란 시가 가장 유명하잖습니까’라고 말씀드렸더니 2층에 올라가시더니 30분 정도 지나서 화선지에다가 동천을 세로로 길게 써서 가지고 오셨다”라고 하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해당 사진은 당시에 미당의 제자가 찍은 동영상 장면이다. 사진제공=서지월 시인

미당은 30여년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같은 문단의 사람들, 제자, 미당을 추모하는 사람들 등 다양하다. 이들은 우리가 시집이나 소설을 통해 한 번쯤 접해본 사람이다. 우선 김동리와 정지용은 그의 대표적인 ‘절친들’이었다. 현재 한국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문효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정희 한국시인협회 이사장, 신경림 시인, 김초혜 시인, 이근배 시조시인 등은 그의 제자다. 학계에도 윤재웅·김춘식 동국대 교수, 구사회 교수 등 즐비하다. 서지월 시인은 미당의 제자인 전옥란 SBS 구성작가의 소개로 미당댁을 찾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이들은 미당 서정주 시인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내기도 하고 쓴 소리도 마다않는다. 미당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많은 에피소드를 전해줬다. 작품으로 접하는 유명 시인과는 또다른 인간적인 미당의 면모가 생생한 목격담으로 되살아났다. 이들 중 본지에는 서지월 시인, 구인모 연세대 교수, 구사회 선문대 교수가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서지월 시인만이 아는 미당의 비밀= 서지월 시인이 기억하는 미당은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1994년, 미당이 1990년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을 때였다. 당시 미당은 서지월 시인에게 “우리 오천년 역사에서 신라시대 최고의 문인은 최치원, 고려시대에는 이규보, 조선시대에는 서거정,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는 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올해는 내가 노벨상을 탈 것 같다” 며 “왜냐하면 내 시가 외국어로 번역이 많이 되었고 내 시를 번역했던 사람이 노벨문학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 덧붙였다. 하지만 미당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 서지월 시인(37세) 미당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사진제공=서지월 시인

서지월 시인은 또 미당이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미당 댁을 방문했을 당시의 일화도 공개했다. 당시 미당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나는 며칠 안 있으면 미국의 아들네 집으로 갈 것이다. 우리 민족은 딱한 민족이야. 누구든지 잘되면 헐뜯어서 깎아 내리기를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이야 내가 이런 땅에서 어떻게 살아. 지긋지긋해”

 

이 말을 들은 서지월 시인은 가슴이 철렁했었다. 서지월 시인은 “아무래도 자신의 친일 시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고 했다.

 

서 시인은 문단에서 잘 알려진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말해줬다. 그는 어느 해 추운 겨울 집에 있는 감홍시를 따다 미당에게 줬다. 당시 미당은 “자네가 준 감홍시 말이야, 그 속에는 까만까치가 파먹은 것이 들어있더구만”이라고 했다. 다음해 1월 미당의 말은 곧 시가 되었다. 시는 ‘서지월이의 홍시’라는 제목으로 <80소년 떠돌이의 시>에 수록돼 있다. 시에는 “대구의 시인 서지월이가 ‘자셔 보이소’ 하며 저희 집에서 딴 홍시들을 가져왔기에 보니 거기엔 산 까치가 그 부리로 쪼아 먹은 흔적이 있는 것도 보여서“ 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서지월 시인은 “정말 나를 아껴주신 분이었고, 지금도 그립다”고 말했다.

 

△미당수업 마지막 수강생 구인모 교수= 동국대 국문과 96학번인 구인모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 조교수는 이미 은퇴한 미당의 강의를 듣는 행운을 누렸다. 대학원에 입학한 1996년 9월 당시 홍기삼 교수(전 동국대학교 총장)가 대학원생들을 위해 미당에게 삼고초려해서 수업을 마련한 것. 구인모 교수는 “감히 범접조차 하지 못할 전설이었다” 며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미당수업의 마지막 수강생이었다”고 말했다.

 

구 교수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81세였던 미당은 남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대학원 수업을 했고, 학생들에게 맥주를 한 병씩 사오라고 시켰다. 학생들에게 권하지는 않고 수업할 때 맥주 3병 정도를 비웠다. 구 교수는 “꼭 생마늘과 함께 맥주를 드셨는데 한 번도 취하신 적이 없다”고 말했다.

 

수업은 문답식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이 미당과 교유한 인물이나 시 세계에 대해 질문하면 미당이 답해주는 식이었다. 개강첫날 미당은 제자들에게 “문학이론은 내가 공부할 때보다 더 좋은 책이 많다.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내가 곧 죽으니까 나랑 교유했던 문학인이나 나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위주로 물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미당의 풀어놓는 당대 문인들과의 교유에 귀를 쫑긋 세웠다. 시인 이상· 김억·오장환 등과의 에피소드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구 교수는 “더욱 놀라웠던 건 미당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임화·김남천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문인들과의 친분관계였다” 며 “우리가 ‘식민지 시기의 문인들의 교유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접근하지 않았나’ 라는 반성을 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일화 한 가지를 들려줬다. 당시 <화사집> 의 일부 구절들이 일본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질문을 미당에게 했었는데,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일본말로 답변을 해줬다고 한다. 구 교수는 “상당히 좋아하는 시인이라 하셨고, 식민지 시기 일본말을 하던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나오신 듯 했다”고 말했다.

▲ 서정주 시인에게 받은‘동천(冬天)’원본. 지난해 발생한 화재로 서정주 시인에게 받은 많은 물품이 소실됐다. 사진은 화재가 진화된 뒤 서지월 시인이 찾아낸‘동천’ 원본. 사진제공=서지월 시인

△ ‘미당은 나에게 가깝고도 먼 스승’ 구사회 교수= “애증이랄까, 마음이 무겁고 아픕니다”

 

동국대 75학번인 구사회 선문대 교수는 박정희 유신정권 시기의 일화를 들려줬다. 구 교수는 당시 선배들과 함께 유신반대 서명을 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미당이 그를 찾아왔다.

 

미당은 구 교수를 사범대학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고창고보 다닐 때 광주학생운동지지시위 주모자로 권고자퇴 당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미당은 구사회 교수에게 “지금 세상이 일제시기와 비슷하다” 고 했다.

 

구 교수는 “나한테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중앙정보부에서 당신이 지도교수니까 책임을 지라고 압박을 넣었던 것 같다”며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미당에 대해 시대문제를 적극적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는 없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수업 시간에도 일제시기 문인과 교류한 내용만 얘기했을 뿐 시대를 비판하진 않았다고 했다. 박정희의 유신에 대해서 말한 적도 없고 전두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대가 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체념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미당이 1980년대에 전두환 지지연설을 한 이후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줬다. 그는 “1950~70년대 보였던 친 정부적인 상황에 대해선 별로 알려지지 않아 큰 문제는 없었지만, 80년대 이후 소문이 확산돼 동국대에서도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며 “남영동의 미당댁을 찾아가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파가 갈렸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미당의 삶과 행적은 미당 서정주 개인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일제 청산과 함께 역사의 중심에 놓여있고, 한편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대다수 한국의 삶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런 지점들을 고민하면서 미당 서정주의 역사적 과오와 함께 그의 문학적 성과도 함께 껴안고 가야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