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장(chef)과 연예인(entertainer)을 합성한 ‘셰프테이너(chef-tainer)’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요즘 대세는 요리사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초등학생 6만3862명을 대상으로 장래 희망을 조사한 결과 여학생은 3위, 남학생은 6위에 올랐을 정도로 요리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요리사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동네에서 눈에 띄는 주방장 한 분을 만났다. 올해 70살의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늘 방실방실 웃으면서 길거리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분이다. 처음에는 거리 악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연을 듣고 보니 아주 오래된 중국음식점의 주방장이시란다. ‘주방장(chef)과 음악가(Musician)’ 그의 삶이 궁금해 무작정 인터뷰를 청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신다. 점심시간이 지난 한가한 시간에 그를 만났다.
△ 일제강점기에 익산에 정착
익산에 거주하는 유비택(70·대만)씨는 화교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부모님이 조선으로 건너와 터를 잡았고, 유씨는 익산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고향은 중국 산둥성 연태시. 화교가 운영하는 화상(華商) 중식당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5남매중 형제가 태어난 익산을 떠나지 못하고 중국음식점을 하고 있다. 아버지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80년이 넘게 중국음식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근처에 사는 친형도, 사촌형도 모두 중국음식점을 하고 있다. 유가(家)네는 선친때부터 익산의 명물인 ‘된장 짜장’으로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유씨 가족의 생존기는 중국요리였지만 그에게 요리는 어린시절 먹었던 콩나물국이다.
“그때는 다 가난 했어요. 부모님도 자식들 먹이고 공부시키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지. 어릴 적엔 맨 날 콩나물국만 지겹도록 먹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는 맨 날 콩나물국이야 투정도 부렸는데. 나이 먹고 지금은 어머니의 콩나물국이 그립네요.”
△ 음악 좋아했던 끼 많은 아이
어린 시절 익산 영정통에서 살던 유씨는 당시의 화려하고 번화가였던 골목을 기억한다.
“내가 살던 평화동 옆에 이리극장이 있었어요. 그때는 제일 비싼 땅이었지. 언젠가 이리극장에 큰 불이 났는데, 한동안 영화 상영을 못하니까,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틀어 줬어요. 그때 공짜로 영화 본 사람 많네. 어린 시절에 영화도 좋고, 음악도 좋고. 끼가 많은 아이였던거 같아요”
어린 시절 5살 위의 누나가 하모니카를 곧잘 불었다. 그런 누나가 신기하고 부럽고 좋아보였던 어린 유씨는 8살 어린나이에 하모니카 소리를 통해 음악을 알게 된다. 독학으로 하모니카를 배웠다. 그렇게 시작된 하모니카 연주는 60여 년동안 그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무거운 ‘웍’을 들고 요리를 하다보면 어깨는 천근만근 손가락을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일과를 마치고 하모니카를 손에 쥐면 하루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 독학으로 악기 섭렵…거리서 공연
그의 무대는 길거리다. 흥에 취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길에서, 가게에서 연주한다. 그의 애창곡은 중국 국민가수 등려군의 ‘첨밀밀’. 인터뷰를 하는 중간에도 계속 하모니카 연주를 들어보라고 신나하는 그의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유씨가 다룰 줄 아는 악기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본격적인 악기 자랑을 시작하니, 말이 빨라진다.
가게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때 묻은 기타(guitar)를 가져와 금새 또 연주를 시작한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본 듯한 ‘호롱박’이 달린 중국 민속 악기인 ‘호로사(hurusi)’ 도 소리를 듣고, 중국에서 직접 구매하고 혼자 연주법을 터득했다. 최근에는 우리 악기 해금과 비슷한 중국 전통악기 ‘얼후(二胡)’에 빠져 있다. 앞으로 색소폰에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모두가 독학으로 배운 악기들이다. 5번만 들으면 어떤 곡도 즉시 연주가 가능하다고 한다.
3개월에서 6개월이면 악기를 거의 마스터 할 정도라니. 타고난 음악적 감각이 풍부한 분이 아닌가 싶다.
슬하에 4남매를 두고 모두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래된 가게를 운영하는 건 오래된 단골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내년이면 재개발로 그의 가게는 철거가 될 예정이다. 그때까지는 한명의 손님을 위해서 문을 열 생각이다.
그리고 빈 가게에서 하모니카를 구슬프게 한 곡 연주 한다. 삶이 고달할 때 언제나 그를 위로해주는 음악이 있기에 오늘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그다.
● [화교는] 세계곳곳 폭넓게 분포·임오군란때 한국 이주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연기 나는 곳에 화교가 있다” “한 그루 야자나무 밑에는 세 명의 화교가 있다” 등의 표현은 중국인이 해외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화교(華僑)는 일반적으로 중국 본토 이외의 국가나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중국계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화(華)’는 중국을 의미하며, ‘교(僑)’는 타국에서의 거주 내지는 임시 거주를 의미한다.
화교의 한국이주는 1882년 임오군란때 청나라군과 함께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1893년 청국조정에서 자국국민의 외국여행금지법을 폐지하고 급속히 진행되었다. 100여년을 이땅에서 살아온 흔적을 간직한 우리의 이웃이다.
익산 영정통에는 중국음식점, 솜틀집을 운영하던 화교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다. 지금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나고 후손들은 지역을 떠나 십여명 정도만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