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 정글

옛 속담에 ‘씨도둑은 못한다’ 는 말이 있다. 요즘에야 유전자 검사로 간단하게 혈연관계를 판명할 수 있지만 이런 과학적 분석이 없었던 시절에도 씨는 확연히 알아봤던 것 같다. ‘그 씨가 어디 가냐’는 말처럼 유전자 감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얼굴 생김새나 신체 특징, 성격 등에서 동질성을 확인했다. 김씨 이씨 박씨 등의 성에다 씨를 붙인 것을 보면 씨를 얼마만큼 중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혈연에서 뿐 아니다. 우리조상들은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 고 할 만큼 종자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고려말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이야기는 차라리 낭만적이다. 백제 시대의 유적지인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목면으로 된 직물이 발견되면서 문익점의 목화씨로 면직물 처음 생산됐다는 기존의 통설이 흔들리게 됐지만 목화의 대량 생산으로 조선의 의류혁명을 가져온 그의 공은 높이 평가 받았다. 이렇게 한 나라의 문명을 바꿀 수 있는 게 작은 씨앗이었다. 지금은 단순한 씨앗에 머물지 않고 큰 산업이 됐다. 종자산업을 농업의 반도체라고까지 부르는 시대다. 첨단 생명공학기술을 활용한 기능성 식품, 의약품 등과 융·복합하면서 종자산업의 외연도 크게 확대되는 추세다. 오죽하면 세계 각국이 종자시장을 놓고 약육강식의 ‘종자정글’에서 ‘종자전쟁’을 벌인다고 할까.

 

그러나 우리는 종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았으면서도 정작 산업화로 연결시키는데 소홀했다. 97년도 외환위기 당시 국내 주요 종자업체가 모두 외국계 기업에 넘어갔으며, 해마다 막대한 종자 로열티를 물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이 우리는 종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본재료인 식물유전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다. 정부 역시 종자산업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다. 그 중심에 전북이 있다. 농업진흥청과 산하 연구기관들이 전북혁신도시에 들어섰고, 정읍에 완공된 방사선육종연구센터와 김제에 조성 중인 민간육종연구단지가 한국 종자산업의 꿈과 미래를 담고 있다.

 

지난 주말 농촌진흥청에서 열린 대한민국종자박람회도 이 같은 배경에서 기획됐을 것이다. 종자가 대중 소비재가 아니어서 박람회가 일반에게 낯설 수 있다. 또 체험 중심의 교육 목적인지, 산업화에 무게를 실었는지 불분명한 점도 있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갓 씨를 뿌린 종자박람회가 전북을 종자의 메카로 각인시키며 종자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김원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