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준은 결국 자신으로부터

▲ 신재연 우주계란 대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려면 직장에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 어디서든 칭찬받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 안에 속해 살아가고 싶어한다. 물론 나라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사람은 살고 있는 삶을 벗어나 다른 대안적인 삶을 위해 찾아 나선다. 그렇게 찾으려했던 삶이 나에게 있어서는 ‘함께 살아가는 삶’이었다. 어릴 적부터 과도한 경쟁에서 자라온 나는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에서 조금은 벗어난 대안적인 공동체 안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과도한 경쟁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삶

 

물론 우리는 ‘함께’ 있어서 이루어 낸 것도 있었고 잃어버린 것도 있었다.

 

우리는 함께 있어서 작지만 단단한 사회를 만들어 냈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개인의 작은 힘들을 모아서 공간을 변화시켰고 사라져 가는 공간에 활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함께’ 라는 말이 위기에 있어서는 굉장히 큰 힘을 발휘하지만 매일 살아가야하는 일상에서는 그 힘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똘똘 뭉치기는 쉬었지만 위기는 늘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에 함께 있음에 쉬이 지쳐가는 나날들도 찾아왔다.

 

그 시절 내가 생각하던 ‘함께’ 라는 뜻은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공평하게라는 뜻과 함께 같은 양의 책임감도 분배되는데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능력이 다르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전 사회와 같이 똑같은 노력과 경쟁이 필요했다. 서로가 그 사람의 특성을 생각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아름다운 사회가 되었겠지만 결국 양으로 측정하는 이전의 모습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더 많이 했는지, 누가 더 잘했는지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도 했다.

 

우리가 그렇게 아웅다웅 서로의 모습을 알아가며 하나가 되어가는 시기에 외부의 사람들이 격려하기도 했고 염려하기도 했다. 그것이 애정이라는 것도 지금은 안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빠르게 우리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매출이 얼마가 늘었다더라 관광객수가 얼마나 증가했다더라’라는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들 중 몇몇이 다른 상권과 얼추 비슷한 매출을 올리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의 모습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드디어 양적으로 이루어낸 결과였다.

 

결국 자본주의를 벗어나려 했던 작은 시도도 자본주의의 양적 평가기준에 도달했을 때 제값을 해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언제까지 지속가능한 삶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또 다른 평가가 우리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외부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 곳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처음 실현하고자 했던 모습들을 또 다시 외부 기준으로 내 스스로가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양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이전의 나와 달라진 점은 내 삶의 가치를 실험해보았다라는 경험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상만을 꿈꿀 수도 없는 것 안다. 나는 현실에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곳에서 배우고 느꼈던 경험을 통해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을 갖게 되었다. 그 기준으로써 나의 가치는 지속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