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멈춤

▲ 이정숙

어느 때부터인가 내 안에서 조급증이 자라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망가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온 지 한참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틀에 묶여 나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루가 모자라 늘 뛰어다니며 사는 사람이 6박7일이나 공백을 가진다는 것은 큰 무리였지만 그냥 눈 딱 감고 떠나보기로 했다.

 

이른바 힐링을 위해 떠나온 지금 참으로 오랜만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보는 산길. 잡다한 생각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어본다. 닫혀있던 오감이 열리어 오랫동안 알아듣지 못했던 자연의 소리들이 생생히 들린다. 가을을 찬미하는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새소리, 물소리, 나무들의 숨소리, 바스락거리며 본향으로 돌아가는 낙엽소리, 살아있는 모든 자연의 소리가 껴울림되어 들린다. 눈을 들어 나무 가지 사이로 열린 하늘을 보며 심호흡을 한다. 티 하나 없는 숲의 향기가 허파를 거쳐 온몸을 정화시킨다. 겹겹이 껴입고 있는 남루한 옷을 벗어버린 가벼움이다.

 

우리가 지구 안에 여러 나라를 이루고 있듯이 산도 우리 사람살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끼리끼리 어우러져 있는가 하면 호젓이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독을 즐기며 사는 식물들도 있다. 땅에 엎드려 있는 작은 이끼에서부터 키 자랑이라도 하는 듯 하늘을 향해 높게 뻗은 편백나무도 눈에 띈다. 그렇다고 편백나무가 잘 사는 것처럼 뽐내지는 않는다. 사랑이 넘치는 마삭줄은 떡갈나무와 포옹을 하며 얼굴을 붉힌다. 쳐다보는 나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진다.

 

음악소리가 들린다. 가을 철새들의 만남과 이별을 위한 향연인가? 아님 산에는 늘 축제가 열리고 있는 걸일까? 곤충나라와 새나라가 합세하여 음악회를 연 모양이다. 멋진 연회복을 입고서 윙윙 날개 저으며 고추잠자리가 지휘를 하고 있다. 개똥벌레는 발광기를 최대한 작동시켜 지휘하는 고추잠자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준다. 빨간 바탕에 검은 점박이 옷을 입은 무당벌레는 자케오처럼 키가 작아 나무 위에 올라 친구들하고 구경을 한다. 귀뚜라미가 퍼스트바이올린 파트를 맡은 듯 고음의 소리를 낸다. 보이지는 않지만 방아깨비는 따다닥 따다닥 작은 북을 치고 있다. 방청객으로 온 도토리가 나무 밑에 수없이 앉아 꺄르륵 킥킥 웃음을 참지 못하고 떼구루루 구르며 박수를 친다. 산에서 대장행세를 하는 독수리는 체통 때문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어디에서인가 대견스럽게 지켜보고 있겠지.

 

도토리 한 알 툭 어깨를 치며 떨어진다. 내려놓음의 아름다움이다. 무거움을 벗어버리니 알몸이 된다. 시간에 쫓기면서 무엇이 되고자 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던가? 이젠 새로움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상처를 치유하여 새살을 돋게 하고 메말라버린 내 감성에 마중물을 부어주어 춘삼월 새싹처럼 여기저기서 움이 돋아난다.

 

그동안 무엇을 위하여 앞만 보고 질주하였던가. 쉬는 것도 용기다. 가끔은 만사제치고 잠깐 멈춰 나를 만나볼 일이다.

 

△이정숙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작촌예술문학상, 온글문학상을 수상했다.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 회장을 거쳐 현재 전북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으로 있다. 수필집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