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동 대륙복지회 사무총장이 돌아본 '연변생활 20년'] 황량하던 곳에 번듯한 아파트

▲ 정옥동 사무총장·1964-1982 전주신흥중고 교사·교감 ·1982-1994 여수애양재활병원 행정국장·1994-2014 중한합작 연변대학복지병원 이사장·1994-2001 연변 무궁화학교 한국국제학교 교장

내 삶의 제2고향인 연변에 가게 된 것은 1955년 전주신흥고 2학년 당시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 거부를 당하고 학교에서 강제 휴학을 하면서다. 6·25와 토벌작전으로 피어린 전적지인 고향에 들어가 절망 가운데 투병하게 된다.

 

이웃들에게 혐오감을 주며 집안에 머물기가 염치없어 빨치산이 출몰하는 산속에 들어가 야생하며 깊은 명상에 빠졌다. 왜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왔는가?

 

깨닫기는 가치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툼과 싸움,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은 참사랑이 없기 때문임을 절감하고 건강이 회복되는 기회가 주어지면 오직 물질이라는 생각에 처한 곳에 가서 참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 세월 기다리는 중 가까운 북한은 문이 닫혀 있지만, 이웃나라 중국이 문이 열려 북한과 가까이 이웃하고 있는 우리 동족이 살고 있는 연변에 가서 함께 살고 싶었다.

 

△의료사역

 

1990년 현지답사를 가보니 가장 절실한 문제가 의료였다. 우선 먹고 사는 문제는 풀려가고 있었지만 인민의 건강을 돕는 의료문제는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낮선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정감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통로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의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10여년 병원업무에 종사했기에 쉽게 의료봉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중국 대외무역법에 따라 최상한인 20년을 약속하고 중한합작연변대학 복지병원을 책임지고 설립 운영하게 되었다. 병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700여명의 심장수술을 했던 병원으로 중국 21개 성 중에서 18개 성 환자가 내원하는 한때 소문난 병원이기도 했다. 접경 지역이었기에 강 건너 우리 동족들이 우리 병원을 찾아와 치료도움을 받곤 했다.

 

함께 간 30여명의 의료일꾼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꽤 많이 드는 치료비를 도와주고 치료받은 어린이들을 방문하여 장학금을 주며 격려하기도 했다. 의료사역을 하다 보니 1차 의료인 예방적 차원의 지역보건사업이 부실한 점이 문제였다. 공산주의혁명기간보다 개방되면서 보건의식이 더 많이 해이해졌다. 그래서 농촌지역보건사업, 도시지역보건사업에 참여하여 보건개발을 중심으로 노인복지와 소외된 어린이 복지사업을 연관시켜 지역사회개발을 돕게 되었다.

 

당시 의료실정의 단면을 몇 가지 예로 들어보면 언청이 수술을 하려고 지역보건사업지역을 조사해보니 환자가 없다. 그 원인을 물어보니 출산시 이런 불구애기가 나오면 부모가 산파(접생원)에게 물속에 잠겨 넣어 질식시켜주기를 요청하면 보건소(위생원)장 재가를 얻어 절명시켰기 때문에 언청이 같은 장애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로 우리 병원에 등록되어 투약 치료하는 500여명의 간질환자의 경우를 보면 간질에 걸리면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퇴학되고, 직장인이면 직장에서 퇴직되고 가정을 이룬 어른들이면 이혼당하는 처지이기에 가정에 갇혀 살고 있는 딱한 실정이었다, 지금은 전 인민의 의료보험이 실시되어 발병되면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수 있었지만 1990년대만해도 지역주민들 말에 의하면 심장병 같은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비가 없어 집에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한글 독서사역

 

특히 연변은 전 세계에서 한반도와 같이 한글 문화권에 살고 있는 유일한 외국이다. 1994년 병원을 개원할 당시 한국에서 그곳에 간 우리 자녀들 대부분이 한글로 교육하는 조선족학교에 들어갔지만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은 사상교육이었다. 그래서 급히 한국 어린이들을 위한 무궁화초등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4년이 지나 중국내에서 최초로 한국국제학교가 허가되어 연이어 교장을 역임하였다. 우리학교에서 전교적인 독서교육을 하다 보니 같은 한글 문화권에 있는 조선족어린이들에게 한글 독서를 시켜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어 친구 두 명과 함께 ‘연변조선문독서사’를 열고 독서교사 양성 반을 지도해서 많은 독서지도자를 배출했다.

 

그 가운데 연변조선족 학교 언문교사(국어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족학교마다 전교아침독서운동이 확산되면서 소수민족인 조선족학교의 위상이 향상되어 가고 있었다.

 

마무리하고 되돌아 올 때는 병원은 연변대학에 기증하고 복지관은 복지단체인 애심어머니협회에 시설을 기증하고 빈 마음으로 못다 한 일에 아쉬움을 가지고 돌아왔다.

▲ 1998년 3월 입춘 후 폭설 때 제설작업 모습. 연길시는 한겨울엔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

△20년간 변화상

 

1990년 처음 방문했을 때 연길시를 비롯한 자치주 도시들의 중심가 외에는 거의 도로포장이 되어있지 않았고 거주하는 가옥들이 평방집(땅집)이어서 집집마다 생석탄을 연료로 썼으며 중소공장들 역시 석탄연료를 사용하고 있어서 도로의 먼지와 함께 매연이 도시를 휘덮어 세탁물을 밖에서 건조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과거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채소밭 밑거름이 인분을 주어서 기생충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서 구충제를 공급하는 일이 우리들 몫이기도 했다. 그곳 화장실 문화가 옥외 공중화장실이어서 집안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화장실 구조는 남녀 구분만 되어있고 출입문이나 칸막이가 전혀 없는 개방식이어서 처음엔 참 어색했다. 우리가 병원을 지으며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지을 때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답답해서 볼일을 보지 못하겠다고 호소해 와서 할 수 없이 개별 칸 문짝을 50cm정도로 맞추는 해프닝도 있었다. 시내버스나 시외버스를 타면 해바라기 씨, 호박 씨 등 온갖 쓰레기가 밑바닥에 쌓여있고, 차내 흡연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거리, 야외 어디고 비닐봉지 등 휴지와 쓰레기들이 버려져있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원이나 놀이동산에는 방변을 하여 악취가 나고 발 디디기가 조심스러웠다. 정화시설이 없어 생활오물이 그대로 하천으로 방류되는 시냇물에서 여름이 되면 남녀가 겨울 동안 씻지 못한 때를 벗기려 완전 나체로 남녀 구별 없이 마치 해수욕장처럼 목욕을 하고 있는 낯 뜨거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연변지역은 2000년 중반부터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거리게 완전 포장이 되고 주택개량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고 거점 적으로 집중보일러가 생겨 어느 도시 보다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생활 오수를 정화시켜 하천마다 맑아지고 식수원이 개발되어 마음 놓고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국가가 농가 지원을 하여 유기비료, 무기비료를 싼값에 지원하여 매년 풍작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에서 중국 농산물하면 공해식물로 우려하지만 연변지역 농산물은 한국농산물 못지않게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연변에 더 많은 관심을

 

내 고향 전북이 연변과 어떤 모양의 인연을 갖는다면 한국에 진출해있는 연변 동포들의 일자리를 타 지역에 비해 더 많이 주선해주고 법적인 보살핌에 신경도 써주고 지역병원과 연계하여 치료혜택도 알선해주고 접근하기 쉬운 곳에 고충상담소도 마련해주며 가능하면 명절을 기해 나그네의 설움을 달래주는 위로회도 열어주면 좋겠다.

 

또 우리 전북에서 연변에 진출한 기업을 챙겨주고 자치주관련 정부기관과 연계하여 전북 기업인들을 도와주면 큰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