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 정민 교수는 말했다. 허황되고 속임수가 판치는 이 세상에 오리 이원익과 같은 분을 저만치 모셔두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그런 청복(淸福)을 누려보고 싶다고. 그런데 나는 그런 분을 모신 적이 있다. 참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그 분이 내 스승, 전북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정년퇴임한 김준영 교수님이다. 1974년 대학 입학해서 20년가량 그분의 지도를 받았다. 학문과 인격을 전수받았다. 그분의 지도를 받아 문학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학문의 깊이도 그분의 십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고, 인격도 감히 그분을 흉내를 낼 수조차 없다. 그분은 재직 당시 전북대학교에서 누구든 애경사가 났다고 하면 누군지도 알려고 하지 않으시고 부조금을 서슴지 않고 냈다. 그러나 정작 사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전북대학교 동료 교수, 제자, 후배들이 문상(問喪)을 가지 못했다. 비밀로 붙였기 때문이다. 내가 사모님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것은 석 달이 지나서 교수님의 둘째 아드님 친구 신영창 교장 선생님을 통해 들었다. 사모님 사후(死後) 몇 달이 지나서야 국문과 이태영 교수와 더불어 교수님 댁을 찾아갔다. 나는 왜 부고(訃告)하지 않았는지 따지듯이 여쭈었다.
“뭘하러 사람들 귀찮게 해. 무슨 좋은 일이라고 알려?”
“교수님, 그럼 교수님은 평생 동안 다른 분들 초상이 나면 왜 그리 찾아다녔습니까?”
“술잔 받아.”하며 웃기만 할 뿐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 한다. 급기야 교수님이 돌아가셨다. 자녀들 또한 부고(訃告)하지 않았다. 예측한 대로였다. ‘전북일보’부음(訃音) 란을 보고서야 곧바로 문상을 갈 수 있었다. 우리는 교수님의 뜻을 어기고 찾아가 문상하였다. 재배하면서 맘속으로 ‘우리가 못 올 줄 알았지요?’라고 말했다. 큰 아드님께 물었다. 왜 알리지 않았냐고. 대답은 예상과 같았다.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아버님의 뜻에 따랐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장례에서도 화환과 조의금을 사절하였다. 조의금을 준비한 조문객들은 멀쭘하다가 방명록에 서명만 했다. ‘전북일보’부음 란에는 알린 이유를 물었다. 큰 아드님이 대답하였다.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려야겠기에…” 돌아가신 교수님의 가치관을 존중하여 부고(訃告)는 내지 않았고, 사망 사실은 신문에라도 알려야 할 책무를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