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지독하게 가난한 생활의 절정에 이런 말을 한다. “그 순간 토마스 제퍼슨이 쓴 독립선언문이 생각났어요. 삶, 자유, 행복추구권 부분이요. 그리곤 생각했죠. 행복이란 오직 추구할 수만 있는 것. 그리고 평생 무슨 짓을 하던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성공 위해 비인간적 삶 살 순 없어
우리 헌법 제10조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여기서 도출되는 권리를 ‘행복 추구권’이라고 부른다. 자유나 평등도 행복만큼이나 추상적인 개념인데, 우리는 이를 각각 ‘자유권’, ‘평등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유독 행복만은 ‘행복권’이 아닌 ‘행복 추구권’이라고 한다.
이 시대 청년들의 행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바라는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혹은 조금 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어도 일정 수준 이상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일정 시기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고, 일을 하면서 때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함께 나이 들어갈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는 삶, 그 정도가 아닐까. 저마다의 행복이 또 있겠지만, 어쨌든 이 시대의 청년들이 바라는 행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이 정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불행 그 자체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고통에 더하여, 실체를 알 수 없는 성공을 위해 비인간적인 삶을 기꺼이 감내하는 노력을 계속 하라는 일부 기성세대들의 이기적인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도 한몫 하고 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변호사가 된 나는 사회에 나름대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전통적인 변호사 업무는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럴 때 제일 먼저 고통의 한 가운데로 떠밀리는 것은 청년 변호사들이다. 내게 일터에서의 시간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내가 원하는 행복도 그리 큰 것이 아니었지만, 이를 위해서 찰나의 만족스러운 순간조차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보상이 충분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이대로 더 버틸 수 없겠다는 절박함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미래의 더 큰 만족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거나 유예하는 것이 유효하던 시대는 가버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어느 정도 고정 고객을 확보한 뒤에야 용기 내서 할 수 있다는 개업이라는 것을 그만 해버렸다. 모은 돈이 많지 않았으니 사무직원 없이 작은 사무실에서 컴퓨터, 전화기와 팩스를 두고 시작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변호사 같은 세련됨은 꽤나 부족하지만 처음부터 일을 만들어 가는 보람은 있다.
행복의 본질은 추구하는데 있어
법률사무소를 어떻게 운영했더니 잘 되고 있다는 식의 성공 스토리를 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청춘이라 일컬어지는 세대가 빠르게 독립된 인간으로 자리 잡기 어려운 때에 평범한 내가 그런 것을 벌써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다만 훗날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불행을 참아내는 일을 이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 지독한 불행일 뿐이라면, 언젠가 행복이라는 지점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진정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행복추구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행복의 본질은, 그 자체보다 그것을 추구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서경원 변호사는 이화여대·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고 민변 아동인권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