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덕남이라는 이름은 충직한 사내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계집아이인 내 이름에 그렇게 우직한 이름을 달아놓고도 모자라 사내 남(男)자를 쓰셨다. 오로지 남동생을 터 팔라는 아들 선호사상의 독단이셨다. 철든 훗날 내 볼멘 추궁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일은 엄연한 삼신할미의 주관이지 내 이름자의 기운으로 결정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시던 할아버지는 여동생 이름 끝 자에도 기어이 아들 ‘자’ (子)를 쓰시더니 그 지극함에 내리 손자 둘을 보셨다.
나는 4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그때 차라리 범국가적 이름인 명자, 춘자 정도로만 붙여주었어도 지금껏 내 이름으로 투덜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성격도 이름을 닮아서인지 내가 나를 보아도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 그대로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께 투정을 하면 “네 이름이 어때서? 여자아이가 사내 이름이면 벼슬할 이름이지.”라고 포장하여 나를 추켜세우지만 내 딸 아이 만큼은 멋진 이름을 꼭 지어주겠노라는 결의로 반박을 대신했다.
철수와 영희는 50∼60년대 내가 배웠던 국어책에 등장하는 표준 이름이었고, 바둑이는 친근한 가축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그 시절 3학년 국어 교과서에 덕남이라는 이름이 실렸다. 바른 윤리관을 주입하던 대표적 글자가 덕(德)이었고, 사내아이의 도덕 지향적 이름으로 덕남이는 당연히 그 글 속의 도덕적 남자아이였다.
그래도 활자를 타고 만나는 내 이름이 반가웠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지명되어 내가 내 이름을 불러대니 책을 읽는 동안 교실은 반 아이들의 킥킥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나 아이들도 신기했던 것이지, 비웃음은 아니었다.
고집스럽고 애교스럽지 못한 내 성격은 사내 남(男)자의 이름 탓이라 믿는다. 지금도 가끔 툭 던지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도 자존심 상해 팩 토라져 사나흘씩 입에서 군내가 돋도록 닫아버린 못된 성격도 내 이름의 사내 ‘남’ 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직장 시절 사전 교류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이름을 보고 남자로 오해하여 배려 받지 못한 채 만삭의 몸으로 일 년 간 힘든 업무를 맡아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 일은 연애 시절의 일이다. 연서의 서두에는 흔히 ‘희’야 ‘숙’아 ‘은아’ 하고 연인을 호칭하며 핑크빛 분위기를 돋우던 시절이다.
그런데 애틋하고 아련한 감정을 깨버리는 남자 같은 내 이름은 글 단락마다 낭만적의 걸림돌이 되기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보내온 글마다 호칭을 생략하고 본문으로 진지하게 들이댔다. 이건 순전히 투박하고 사내 같은 내 이름자의 탓이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사내 남(男)자를 썼느냐는 원망은 인생막장인 이 시점에서도 내 안에서는 사그라질 줄 모른다.
항상 생각에 그치고 말지만 아직도 가끔 간지러운 여자 태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매일같이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가야금을 뜯으며 남편의 피로를 풀어준다던 선배처럼 남편 사랑을 붙들어 맬 수는 없어도 여인의 필수 덕목인 삽삽함은 지금도 흉내 내고 싶은 나의 염원이다.
△김덕남씨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수자원공사가 주최한 제5회 물사랑 공모전 수필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