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은 홍수보다 무섭다

▲ 송재용 전북대 초빙교수
40여 년만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급수지역이 줄어들지 않고 있지만, 가뭄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은 언제나 농심일 뿐이다. 홍수는 단기간에 휩쓸고 지나가면서 눈에 두드러진 피해를 주기 때문에 모두들 관심을 가진다. 가뭄은 그렇지 못하다. 도시에 살면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까닭이다.

 

마야 문명은 가뭄으로 몰락했다. 동학농민들도 극심한 가뭄 속에 수세(水稅)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폭발했다. 선거를 앞두고 올 봄 민심이 두렵다. 라이벌(rival)도 강(river)을 둘러싼 물싸움에서 유래됐다지 않는가?

 

홍수 땐 4대강이 빛을 못 보더니 가무니까 재조명 되는 것 같다. 4대강사업은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공과를 논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아쉬움이 사무치는 것은, 청계천같이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국민대통합의 기회였는데 천금 같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강을 안고 살아간다. 강은 우리의 고향이다. 왜 강물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가? 이 산 저 산을 다 아울러야하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은 강을 통한 사회통합의 좋은 기회였다. 만일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과 그 참모진이 조금만 긴 호흡을 했더라면, 가령 제일 열악해 절대 실패하려도 실패할 수 없었던 영산강사업 하나만 시범으로 했더라면, 그 유역 내 상·하류 모든 구성원을 아우르며 강 살리기의 모범을 보였더라면 지금 어찌 되었을까? 나머지 3대강에서 서로 우리도 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4대강 중 3대강사업은 낙동강사업을 위한 꼽사리였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한정된 예산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이도 길고 공사비도 많이 드는 낙동강사업은 나중에 했어야 옳았다.

 

그랬더라면 누군가는 한국판 러시모아산(Mt. Rushmore)에 길이 새겨지는 인물이 됐을 것이다. 석유를 블랙골드라 하고 물은 블루골드라 부른다. 블루골드 시대엔 유조선의 평형수도 4대강 물을 채워서 중동에 팔아야 한다. 이미 물 값이 석윳값보다 비싼 시대 아닌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청년시절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0여 년 동안 종살이, 옥살이 하면서 이집트의 총리가 될 역량을 갖춘다. 풍년 동안 장차 닥칠 7년 대흉년에 잘 대비한 덕에 당대 최고의 통치자 파로호는 그저 먹었다. 4대강사업은 한국판 요셉을 배출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지금도 늦진 않았다. 4대강에 아무리 많은 물을 확보한들 끌어다 쓸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이제 4대강 물을 어떻게 끌어다 쓸지 집단지성이 나서야 한다. 최소한 친환경적인 항구대책이 마련되기까지는 4대강에 호스라도 대고 타들어가는 농심에 양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4대강을 방치하거나 허무는 것은 또 다른 환경훼손의 시작이다. 누구도 탓할 필요 없다. 탓해서는 분란만 생긴다. 경위야 어떻든 수업료를 많이 내고 얻은 새로운 자원 아닌가? 가난했던 미국 유학시절, 아이들과 함께 사우스 다코다주 대평원에 있는 러시모아산(Mt. Rushmore)에 간 적이 있다. 부러웠다. 그 휑한 벌판 높지 않은 돌산에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된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다. 멋지다. 왜 우리는 온 국민에게 추앙받는 저런 자랑스러운 대통령 한 명이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