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하면 기축옥사(선조 22년, 1589년) 때 동인과 서인간의 패권 정쟁의 희생양으로 ‘관제 역모 죄의 정여립 모반사건’이 조작된 이후 지식인의 중앙인재 등용이 막혀버렸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토록 짓밟히고 차별과 소외, 철저한 인재차단의 설움을 뼈아프게 겪은 호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환란과 국가수호의 전쟁을 맞으면 당파와 신분, 처지나 지역, 소속, 계층의 높낮이를 생각지 않고 한마음으로 일어나 투쟁한 것은 참으로 착한 바보들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싶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호남의 위국충정 정신을 다시보게된 선조가 ‘호남의 걸출한 인물들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골짜기에 홀로 향기를 품고 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의 광채를 감추게 되었도다. 이제야 난을 당해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도다’라고 후회하면서 호남의 소외와 인재발탁 차단과 지역차별을 스스로 인정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선조의 참회는 양란 이후 구두선에 머물렀으며 지역차별과 인재차단은 개혁되지 않고 지속됐다.
그럼에도 호남인의 위국충절과 절의, 진충보국의 정신은 도리와 실천, 사회개혁과 정의실현 정신으로 대대로 이어지면서 내재화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한 것은 물론 군비 마련 같은 경제적인 것도 있었겠지만 호남인의 핏속에 흐르는 의병, 선비정신이 강고했음을 지적한 것이리라.
동학농민혁명, 광주민주화운동이 바로 그러한 호남의 정신을 표상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동학농민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은 호남정신이 덕목이 되고 인성이 되면서 사회화된 것이었다고 본다.
이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 이즈음, 임진왜란의 격전지 이치에 무명의병 순국비가 전북역사문화학회와 완주군의 주도로 제막된다.
오는 3월 19일 11시에 제막되는 ‘이치 400 무명의병 순국비’는 전국 각지에 있는 수많은 장군, 영웅, 의병장들의 선양, 추숭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계층과 신분을 떠나 지역민의 참여와 협력으로 이보, 소행진, 황박 유생이 이끌어 낸 지역의 양반과 평민의 무명 항쟁의 역사를 새롭게 기리는 뜻 깊은 모습이다. 이제까지 호남정신을 몸으로 실천했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음에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던 무명 의병들의 공헌 순국 순절을 늦게나마 재조명하고 위로, 감사하는 국민적인 기념비가 건립되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의무와 책임을 ‘작지만 큰 꿈을 가진 완주군’이 이루어낸 것에 박수를 보낸다. 이 기념비는 아마도 우리들에게 문화 애국과 보국안민의 살아있는 교훈이 빛나는 모범적 기념비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