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다. 친구들이 매년 5월이 되면 일정을 비워놓고 전주 여행을 계획한다는 사실을. 그런 ‘전주’에 운 좋게 살고 있는 나를 덤처럼 보러 습격한다는 사실을. 이제 과감하게 한옥마을은 생략하고 전주 천변길이나 뒷골목을 찾아다니며 블로그 맛집보다 현지인이 가는 진짜 식당을 어슬렁거릴줄 안다는 것을. 삼례 비비정이나 우석대 캠퍼스를 넘어 소양의 송광사나 작은 호숫가조차 동네사람들처럼 눈에 익게 되었다는 것을. 게임 퀘스트 깨듯 매년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며 ‘전주력’ 만렙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못난 친구들, 그들의 이상한 열정이 이제는 두렵다.
전주영화제가 더 설레는 이유
그런 까닭에 친구들을 ‘모시고’ 영화의 거리를 싸돌아다니다 상영관에 줄줄이 앉아 다큐멘터리영화나 제3세계 영화에 눈 맞추는 일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연중행사가 되었다. 리플릿과 데일리 책자를 꼼꼼히 읽어보며 올해 프로그램과 섹션별 영화를 살펴본다. 낯선 감독의 더 낯선 언어를 접하며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 이름이 사라질 때까지 짠하게 지켜본다.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만난 감독과 배우와 평론가의 대화에 호응하고 영화가 남긴 소용돌이를 매만지며 묵직한 기분으로 상영관을 나선다. 우리는 매년 전주국제영화제가 부려놓은 서로 다른 영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조금씩 성장했다. 불편한 영화의 결말에서 환한 진실을 목도하기도 했다. 그런 변화의 면면을 감지하면서 전주국제영화제의 존재가 관람객의 태도와 생각을 어떻게 진취적으로 바꾸어놓는지 생각했다.
국정원의 간첩 조작사건을 집대성한 다큐멘터리 〈자백〉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된다는 것은 근래 가장 놀라운 소식이었다.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문화방송 해직 피디 출신 최승호 〈뉴스타파〉 앵커여서 더 그랬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걱정이 됐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인 김승수 전주시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영화 표현의 자유는 전주 시민과 관객을 위한 것이며 어떤 외압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근래 들은 가장 고마운 말이었다. 20년 동안 공들인 부산국제영화제의 탑을 무너뜨리고 있는 자들이 지난 몇 년 간 절대 언급하지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수상하고 이상해지는 시절을 살고 있는 지금, 독립과 자유는 망각의 구호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런 면에서 언제부턴가 영화가 사라진 것 같은 모든 영화제에서, 오직 영화와 이야기 프로그램에 집중하려했던 전주국제영화제의 의지가 새삼 빛난다. 급진적인 미학 영화들에 고립되지 않으면서도 산업적으로 생산성을 확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들의 노력은 귀중하다. 물론 예산이나 규모면에선 비교 곤란한 2등이지만, 다른 쪽에서 더 행복한 2등이 되면 좋겠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영화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외압 없는 자유로운 영화제
나흘 뒤인 29일 금요일,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막이 열린다. 그날 여고 친구들도 전주에 온다. 우리는 온라인 예매가 오픈 되자마자 가장 먼저 끊은 그 영화를 보고, 조금 어둑해지면 자주 가는 선술집에서 놀다가 불콰해진 얼굴을 들고 오랜만에 한옥마을을 산책할 것이다. 가맥집에서 영화 얘기를 하며 노가리를 뜯다가 좀더 붉어진 얼굴로 집에 와서 가져온 이불보따리를 아무렇게나 펼쳐 놓고 뻗어 잘 것이다. 다음 날 느즈막이 일어나 콩나물국밥을 먹고 천변을 산책하다 생각난 듯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역으로 역으로, 각자의 도시로 흩어질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약속처럼 모이는 전주의 봄, 영화의 거리. 얼굴만 봐도 흥겨운 못난 친구들의 습격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