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을 나와 귀갓길에 올랐다. 네비게이션이 집까지 안내하는 시간은 3시간 이상 걸리는 긴 거리였다. 안동에서 예천, 남상주 IC에서 대전, 그리고 전주까지, 갈 때와 방향만 다를 뿐 빙빙 돌고 돌아야 하는 동선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쩌랴. 하회 마을 역시 낙동강이 휘감아 돌던 곳에 있었으니 내가 강이 되어 돌아가는 수밖에. 도로가 굽이 길과 오르막이 많고 공사구간이 많은데다 비가 내린 탓에 바닥이 온통 흙투성이서 차 룸미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나온 시간들이 온통 흐릿했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이르렀을 때 ‘말 무덤’이란 입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당연히 ‘말(馬)무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言)무덤’이었다. 차를 길 한 쪽에 세우고 안내판을 따라 들어갔다. “마을에 여러 성씨가 모여 살았는데 집안끼리 싸움이 그칠 줄 몰랐다. 어느 날 지나던 나그네가 마을이 풍수적으로 개가 짖어대는 모습을 띤 혈이라서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 주둥이 송곳니 되는 곳에 날카롭게 생긴 바위를 세 개 세우고, 앞니가 되는 곳에 바위 두 개를 세워 재갈을 물리게 하였다. 끝으로 싸움을 일으킨 발단이 된 말(言)을 묻어 말(言)무덤을 만들었더니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잘 지냈다.”는 유래담이었다.
“내 말은 남이 하고 남의 말은 내가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와 같은 말을 바위에 새겨 말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채찍하고 있었다. 「논어」에서도 “일에는 민첩하되 말은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통해 말과 관련된 속담이나 경구가 많은 것은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면서 말실수를 가장 많이 하며 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을 전달하다 보면 보태기 마련이지 덜지는 않는다. 말은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한 쪽 말만 경청하거나 듣기 편하고 좋은 말만 가려서 마음에 집어넣는다. 이것으로 끝내면 좋으련만 상상력을 무한대로 발휘하여 자기 생각까지 덧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거나 특정인을 말로 죽이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있는 조직이나 사회는 늘 분쟁과 갈등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불신이 기생식물처럼 붙어 다닌다. 우리는 아침햇살처럼 맑고 깨끗한 말을 하기보다 어둡고 칙칙한 말을 하면서 살 때가 많다. 소망적인 말보다 절망적인 말, 품어주는 말보다 밀어내는 말, 등을 대주는 말보다 등을 돌리는 말, 아랫목처럼 따스한 말보다 차디찬 얼음 같은 말을 많아 하며 살아 왔다.
귀갓길,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쓸 데 없는 말을 모아 “말(言)무덤‘에 묻은 선조들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한 말 가운데 ’말(言)무덤‘에 매장해야 할 말은 얼마쯤 될까. 감사하지 못하고 뱉어낸 불평, 불만, 원망, 망은의 말. 겸손하지 못하고 쏟아낸 교만, 자랑, 오만스러웠던 말. 경외하지 못한 불경스러웠던 말, 순종하지 못한 고집스러웠던 말. 관대하지 못한 인색하고 탐욕스러웠던 말들 천지였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내가 한 이런 말 때문에 상처받았거나 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이 말들에 대한 부고장을 보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겨울오후가 저물고 있었지만 다가올 시간들이 청명하고 가지런하게 쌓여 대낮 같았다.
△최재선씨는 월간 〈창조문예〉에서 수필, 계간 〈에세이〉에서 동시로 등단했다. 수필집 〈이 눈과 이 다리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무릎에 새기다〉가 있으며, 현재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