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간호학과 학생으로 지하철 끝과 끝을 달려 일주일에 두 번 내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인터넷 과외사이트에서 본 소개글이 마음에 들어 ‘찜하기’ 버튼을 눌렀다가 만났는데, 나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분이었다. 첫 만남 만큼이나 학습법도 남달랐다. 수학연습장 한 권을 다 채울 때마다 자필편지를 써주는가 하면 태도 산만한 내게 “십 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보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말로만 듣던 대학캠퍼스 잔디밭을 뒹굴게 한 것도 선생님이었고 도서관의 책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알게 해준 것도 그녀였다.
책 냄새가 좋다는 걸 알려준 선생님
그 사이 두 장도 쓰기 버겁던 연습장은 다섯 달 만에 무려 11권으로 늘었고 나는 여름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보여줄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모의고사 시험지, 특히 빈 공간이 많은 수학시험지엔 어설픈 자작시와 소설 문장이 가득했다. 긴 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문제의 시험지를 선생님께 들킨 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내게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몰라봐서 미안하다. 이제 수학 공부 하지 말자.”
그런 선생님을 거의 십년 만에 만났다. 그런데 나로서는 무척 서운한 소식을 들었다. 올 가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는 것이었다. 못 본 사이 선생님은 결혼을 했고,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었다. 나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기들보다 빨리 취직해 간호사가 되었지만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 도저히 자기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없었고, 이러한 삶을 놓을 수 없는 한국 시스템 안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집에는 가구가 없었다. “원래 사방 벽이 다 책장이고 책이 2천권쯤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살고 있구나, 저 물건들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구나 그런 마음이 들더라.” 그래서 한 권 한 권 다 팔아버리고 나니 딱 200만원 남더라고, 내친 김에 퀸사이즈 침대와 식탁, 의자, 소파도 다 처분해버렸더니 비로소 집에 ‘뒹굴거릴’ 자리가 생겼다고 웃었다. 그때부터일까. 필요한 물건만 사고 불필요한 모임이나 각종 경조사,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스스로 해방될 수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삶은 버텨내는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가꾸어가는 것이라는 걸, 선생님은 조금씩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천천히 기다려주고 가르쳐줘
헤어지는 날, 내가 내민 소박한 선물에 선생님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예전부터 선물을 참 잘했지. 고맙거나 미안하거나, 어쩌면 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뭔가를 줬던 것 같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물질적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해 삶의 각도를 조금씩 돌려놓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마음으로 느린 나를 천천히 기다려주고 가르쳐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선택을 믿는 일이 훗날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