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사 군인 아들 박연호씨 "아버지 훈장 보며 호국안보 참뜻 깨달아"

대 이어 나라사랑 실천 경찰 몸담아 / 매년 6·25 사진전 열며 학생들 교육

▲ 휴전을 앞두고 금화지구 전투에서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무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박연호 씨가 23일 익산 팔봉군경묘지에서 아버지의 비석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다. 박형민 기자

23일 오전 10시 익산 팔봉 군경묘지에서 박연호 씨(64)가 아버지의 훈장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외동인 그가 3살 때 고향 정읍을 떠난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해 금화전투에서 전사(戰死)했다.

 

“아버지가 1953년 7월14일에 금화전투에 참전 중 전사하셨는데, 알고보니 휴전일(7월27일)을 불과 10여 일 남겨뒀더라고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어린 나이에 그렇게 아버지를 잃은 박씨는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흙으로 만든 초가집이라 외풍이 심해 겨울에는 할머니와 껴안고 잠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참전 중 돌아가신 뒤 6살인 박씨를 남겨둔 채 집을 나간 어머니는 초가집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집을 나간 어머니는 아버지 앞으로 나온 보상금까지 모두 챙겨 외가로 들어간 뒤 재혼했다고 한다.

 

할머니와 단 둘이 어렵게 살아온 박씨는 신태인고를 졸업한 뒤 1972년 군산시 경암동 합판 공장에 취직했다. 이 곳에서 6년을 근무하던 그는 어느 날 야간근무 중 두 살 많은 직장 선배로 부터 “아버지가 참전군인이신데 왜 여기 와서 일을 하느냐, 공무원이 되어보는 것이 어떠냐”라고 권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박씨는 경찰관이 됐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가를 위해 일해보겠다’는 생각에 학원에 다니며 경찰관 채용시험을 준비했는데 운좋게 합격해 27세에 경찰관이 됐다.

 

2남 1녀의 가장으로 가정과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박씨는 지난 2013년 7월 아버지(육군 일등병 박찬구)의 무성 화랑무공훈장을 대신 받았다.

 

전몰군경유족인 박씨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녀의 이름을 지었다. “마음 속에 항상 그려온 아버지께서는 어질고, 참되고, 은혜로우신 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박씨는 자녀들의 이름을 인성(41)·진성(44)·은성(46)으로 지었다고 했다.

 

경찰에 34년간 몸담았던 그는 지난 2014년 익산경찰서 용동파출소 순찰요원을 끝으로 경위 계급장을 달고 퇴직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해온 박씨는 퇴직 후에도 아버지의 대(代)를 이어 또 다른 나라사랑을 실천해 왔다.

 

“적삼 저고리라고 아실랑가 모르겠네, 그때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면 정말 6·25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해지죠.”

 

그는 2014년 5월부터 익산자원봉사센터 회원 40여명과 함께 익산지역 학교를 돌며 한 해 10여 차례 ‘6·25 사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 해에는 이리남창초와 용안중, 함열초를 돌며 6·25 사진 전시회와 함께 전교생 수 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나라사랑 교육도 실시했다.

 

박씨는 “지금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우리 청소년들은 과거의 우리나라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잘 모른다”며 “6·25 전쟁을 설명하며 나라사랑의 마음을 심어주기 위한 강연을 하고 있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년 6월 25일이 되면 박씨는 가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게 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업적이 있으셨는지, 왜 돌아가셨는지 잘 몰랐지만, 아버지의 훈장을 보면서 비록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삶이지만 아버지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오늘 만큼은 꼭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위해 다 같이 기도하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