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택아 고맙다

▲ 김영헌 재경 장수군 향우회 부회장
서울살이를 하면서 한 40여 년 다니던 교회를 옮겼다. 집을 장안동으로 이사하면서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두 달째 나간 새로운 교회에서의 일요일 낮 예배 시간이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 휴대전화를 끄려는데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뒷머리 좀 만져요’라는 내용이었는데,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서 보낸 문자 같았다. 새로운 교회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고, 집사람은 내 옆에 앉아 있었기에 이상할 따름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으려는 데 또 문자가 들어왔다. ‘죄송해요. 장계교회인데요 애들 아빠 머리가 붕 떠서 문자를 보낸 것이 잘못 갔어요’ 그제야 문자 발송자가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 그랬군요. 혹 종택군 부인이세요?’하며 반갑게 안부를 전하고 문자를 끝냈다.

 

두 남자의 뒷머리가 헝클어진 우연의 일치가 서울과 장계의 예배당에서 일어난 셈이다. 거울 보는 걸 게을리하는 두 남자의 습관에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늙는 탓만 할 수는 없는 법이고, 피식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사실 나는 사흘에 한 번꼴로 종택이 한테 전화를 한다. 살아가면서 궁금한 것들을 주고 받는다. 종택이는 칠십을 살아오는 동안 줄곧 고향 장계를 떠나지 않았다. 고향의 누가 건강한지, 앓는지, 돌아가셨는지 소식을 챙겨주는 고마운 이다. 종택이가 전해주는 것들은 모두 나에게 신선하고 살아있는 소식들이었다.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며 서로 꿈을 키웠는데, 그가 전주에 있는 북중과 전고를 다녔기에 방학때나 만날 수 있었다. 장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었다. 우리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흩어진 생활 속에서 우정은 더욱 단단해 졌다.

 

본의 아니게 나는 서울 생활을 하느라 늙음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만 가는 것 같은데, 종택이는 무슨 재주가 있는 것인지 항상 청춘처럼 건강하게 지낸다. 그 모습이 부럽기 그지없다.

 

30여 년도 훨씬 지난 일인 것 같다. 내가 서점을 운영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떤 사정에서인지, 그가 서울 성북동 건축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의 차림새를 보고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현장을 지키며 기숙하던 그를 가끔 찾아가 밤 하늘이 뿌연 새벽이 올 때까지 세상 사는 이야기와 그 당시 암울한 정권의 종식에 대한 예상도 하면서 새로운 민주를 도모 했었다.

 

종택군 부친은 육군 창설부터 5·16 직전까지 장군이었다. 장계중학교가 화재로 전소되었을 때 교사를 다시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종택이는 그것을 앞세워 자랑하거나 잘난 체 한 번 하지 않았다.

 

성북동 현장이 어느정도 완성 되던 어느 날 밤, 서점 문을 닫고 찾아가니 종택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에게는 잠깐의 객지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저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그게 ‘나에게는 정답’이라고 우기며 귀향을 유혹하고 있다.

 

깃대봉 아래 거짓 없는 농토의 좁은 여백에도 120여 마리 염소가 바쁘게 뒤를 따르겠지. 그의 어눌하지만 분명한 소신을 신뢰한다. 그의 앞에서 자꾸 무력해지고 왜소해지는 내가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