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대 일왕 아키히토는 두번의 큰 외과수술과 83세의 나이로는 천황의 임무를 다 할수없어 생전 퇴위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일본 왕실 전범에는 생전 퇴위에 관한 규정이 없어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퇴위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다.
우리는 불행히도 화려했던 우리 고대 역사 사료가 지금으로부터 550년전에 본격적인 소각의 운명을 갖게 되었다. 조선의 8대째 임금이었던 세조는 조선 8도 관찰사들에게 명을 내려 우리 고대사 관련 사료들을 개인들이 소유 내지는 보관을 못하도록 수거해 버렸다. 그 수거 대상 사료들에는 [고조선 비사 ]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오늘날 소위 강단 사학자들이 위서라고 폄하하고 있는 [환단고기]의 원본일수도 있는 [안함 동중 삼성기]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금서의 고대 역사사료들은 민간속에서 면면히 비밀 전승되어 오던중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또 다시 일본으로의 강제 반출이라는 수난을 당했던것 같다. 갖가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의 강제 반출이라는 수난 속에서 우리 고대사 사료들이라고 안존의 행운을 누릴수 있었겠는가.
그후 다시 우리 고대사 사료는 일본의 36년 지배하에서 고난을 겪게 되었으니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전국 경찰서를 동원하여 우리 고대사 사료중 [단군 조선 관련 고대사 ]등 51종 20만권을 수거 소각해버렸다. 이런 조치는 우리 민족 정신을 깡그리 말살시키겠다는 망상에서 비롯된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일부사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본 황실 지하 창고나 황실 도서관에 보관 비치되었다고 한다.
일본 동경대학 에가미 나오미 교수의 [기마 민족 정복설]의 주장을 효시로 일본 고대국가는 백제인의 작품이라고 많은 일본 역사가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고대 일본 카와치 왕조를 세운 제 15대 오오진 일왕 그의 아들 제 16대 닌토쿠 일왕, 제 29대 킨메이 일왕. 제 30대 비타츠 일왕. 제 31대 요우메이 일왕. 제33대 스이코 여왕, 제 34대 죠우메이 일왕등이 확실한 백제인이었다. 이렇게 주장되는 근거는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일본 불교사인 [부상략기]. 일본 왕실. 귀족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등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여 곡정끝에 일본 황실 도서관에 비치된 우리 고대사 사료들을 연구했던 아키히토 일왕으로서는 한국과 일본을 일란성 쌍둥이로 보았을것이며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절제된 표현으로 2001년 그의 68세 생일날에 기자들을 향하여 “ [속일본기]에 의하면 일본의 제50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것에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언급은 일본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자주 말했으며 특별히 그의 당숙을 시켜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케 했다, 이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귀속의식의 발로라고 할것이다. 그가 건강을 이유로 구태여 생전에 퇴위 하겠다는 것은 호전적인 아베 총리가 전쟁 할수있는 헌법으로 개정하겠다는 움직임에 대해서 생전 퇴위라는 우회적인 저항으로서 맞서고 있다고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