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둘레 길을 걷기 위해서 새벽에 길을 나섰다. 샛별은 변함없이 반짝이는데 옆에 떠 머물러 있는 상현달은 빛을 잃어간다. 간밤에 세차게 불던 바람은 가로수의 무수한 나뭇잎을 성급히 떨어뜨려 놓았다. 낙엽이 발밑에 애잔하게 밟힌다. “인생이란 낮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이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사랑하라” 인도 빈민가의 척박한 땅에 고귀한 사랑의 씨앗을 뿌린 ‘마더 데레사’수녀의 말이 생각난다. 젊어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주변 삶들이 이제는 어렴풋이 그 윤곽들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확실한 것은 영원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에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은 이 낙엽들처럼 다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기세등등하던 올 여름의 폭염도 9월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시절 앞에 꼬리를 사리고 말았다. 더위에 맞서 쉼 없이 돌던 선풍기도 이제 한쪽으로 비켜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나는 한여름의 찜통더위를 나만의 최고 피서 방법인 방콕을 즐겼다. 그저 집에 콕 박혀서 책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사십대에 찾아온다는 사추기의 터널도 이 여행을 즐기다 보니 지나칠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의 여정에 예고 없이 찾아온 나름대로의 어려운 시절도 무리 없이 이겨낼 수 있었다 책 속에서 마음의 위안과 값진 격려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삶의 지혜도 배울 수 있어 더욱 좋았고, 뒤늦게나마 살아온 자취를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나는 삼 년 전부터 성경을 하루 한 장씩 필사해 왔다. 그러다 보니 완필이 눈앞에 이르렀다. 그 동안 유례없는 무더위는 선풍기의 힘으로 밀어내고 나만의 책상 겸용으로 쓰는 식탁에 앉아 한 자 한 자 쓰고 나면 하루 지난 어제의 일기를 썼다. 고개만 돌려도 금세 있었던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이 일쑤였는데 생각을 곱씹어 어제 일을 나열하다 보니 기억력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 일상들을 삼 년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 왔다. 그리고 올 여름에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보기도 했다. 빌려온 책은 반납 기일이 있어서 독서에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찾아들 틈이 없어 좋았다. 만년에 좋은 친구가 자리해 주어 지난여름 극심했던 더위를 지나칠 수 있었다.
가끔 친정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살아보니 아무 것도 아니어!” 희망을 부풀려 걸어놓고 애면글면 했던 것들도 다 부질없음을 떨어진 낙엽을 보며 터득하게 된다. 세월의 물살이 속절없이 너무 빠른 속도로 흘러가 버리니 자선과 선행으로 지은 나만의 값진 수의에 이따금 생각이 머무는 때가 있다. 이제 나도 이것을 준비해야지 싶기도 하다. 자선은 가진 자만이 베푸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위로에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2003년에 복자로 시복 되었다가 올해 성인품에 오른 마더 데레사 수녀는“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대하듯 마음을 담아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라고 했는데, 그분의 말과 행적이 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어려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해온 그분의 삶이야말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된다. 가을의 문턱에서 새롭게 다짐해 본다. 일상에서 나를 스치는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내어주는 하루하루이기를 바라고 싶다. 작은 것일지라도 받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비움으로 채워지는 충만감을 느끼며 살기를 염원해 본다. 하릴없이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스산해졌던 마음에 새로운 삶의 군불을 지펴본다.
△서계숙씨는 〈순수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민들레의 기행〉을 펴냈다. 현재 ‘전북문학관아카데미 수필반’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