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자식사랑이 빚은 국가적 비극

딸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 온 국민 분노케 한 도화선…오만·독선 바로 잡는 계기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아이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다. 유치원 졸업 때 유치원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준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경연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저 그런 상업적 목적의 대회지만 아이는 자신이 피아노에 재능이 많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술중·고교 진학을 원했다. 음악에 문외한인 부모는 아이의 재능을 긴가민가하면서 망설이다가 아이의 꿈을 꺾었다. 유전적으로도 그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질 수 없다고 봤고 음악 공부를 하게 할 경우 그 뒷바라지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재능이 있다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고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부모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꿈을 펼치지 못한 한을 담아뒀을 것이며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의 꿈을 맘껏 펼치게 하지 못한 무능에 미안한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흔히 겪는 고민과 갈등이다.

 

최순실 씨와 그의 아이는 달랐다. 아이가 어떻게 승마에 관심을 갖게 됐고 얼마만큼 재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딸을 위해 온 나라를 뒤집어놓았다. 딸 정유라 씨는 고등학교 시절 승마 대회 출전을 이유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아도 졸업에 문제가 없었고 승마 특기생으로 이화여대 입학과 학점 취득과정에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전국승마대회에서 우승을 못해 심판으로 참여했던 지역 승마협회장들이 낙마했고 감사를 벌였던 문체부 체육국장 등이 ‘나쁜 사람’으로 찍혀 옷을 벗었다. 독일에서 말 구입과 전지훈련 등에 사용된 수십억 원의 비용 역시 일반인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 자금 출처가 삼성의 특혜지원으로 드러나고 있어 최씨의 딸 사랑이 어디까지 뻗쳤는지 가늠이 안 될 지경이다.

 

최씨의 딸은 자신의 재능이나 부모의 호주머니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장 마술의 재능은 좋은 말을 구입할 수 있는 재력에 달렸으니까. 대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심판을 영구 퇴출하고 학교 출결 관리와 대회 심판 문제까지 관여할 수 있는 어머니를 둔 정유라 씨가 ‘돈도 실력이야, 니네 엄마 원망해’라고 올린 글은 차라리 솔직했던 셈이다.

 

최순실씨가 딸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최순실 게이트’가 쉽게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이야 국정 전반을 흔든 정황들이 연일 쏟아지면서 그 끝을 모를 정도지만 이렇게 꼬리를 잡힌 계기가 딸과 관련된 특혜 의혹에서였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국선언에 나섰으며 고교생까지 나서 대자보를 붙일 만큼 최씨의 딸을 위한 갑질 행태가 공분을 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씨의 잘못된 행태의 극단적인 딸 사랑이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무능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공신이 될 지도 모르겠다.

 

흔히 분노의 시대라고 한다. 분노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이다. 자신의 바람이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좌절할 때 발생하는 억제하기 힘든 정도의 감정을 말한다. 분노는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개인에 따라 정도가 심할 경우 ‘분노조절장애’로 치료받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 않아도 분노할 일이 많은 시대에 최순실 게이트가 전 국민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모든 분야에서 이뤄졌던 잘못된 일들이 ‘최순실 작품’으로 치부된다. ‘최순실 패닉’에 빠지면서 옳고 그름의 기준도 모호해졌다.

 

더 큰 문제는 ‘최순실게이트’가 최씨 혼자 만든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박근혜 감독과 출연 배우들의 부조리가 얽혀 만든 종합 부패 세트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제대로 견제가 이뤄지고 건강한 의식이 발동했다면 이런 막장 드라마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공평한 시스템 내에서 공평한 심사를 받을 권리가 있고 그럴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 우리의 꿈과 희망 그리고 조금이나마 남은 마지막 믿음을 지켜줘’라고 대자보에 적은 원광고 학생들의 작은 소망 하나 지켜주겠다고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