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모든 사람이 이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런 사자성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제발 네 욕심만 챙기지 말고 이웃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아라”라고 꾸짖고자 했음이리라.
살신성인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일수록 인간미가 넘친다. 신문 지상에, 방송에 의인과 관련된 기사가 보도되면 독자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인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2001년 1월26일 일본 신오오꾸보역이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지하철 플랫폼에 있던 유학생 이수현씨는 취객이 지하철 선로에 쓰러진 것을 목격, 곧바로 구조에 나섰다.
일본인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씨도 함께 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취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선로에 뛰어든 이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온 열차를 피하지 못해 결국 사망했다. 사고 현장에는 두 사람의 의인이 보여준 숭고한 정신,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추모 플레이트가 설치됐다.
하지만 똑같은 사고가 일어난 미국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은 달랐다. 뉴욕 타임스가 ‘우리 시대의 키티 제노비스’(1964년 키티 제노비스는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앞에서 살해당했는데, 이를 지켜본 38명 중 어느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사건)라고 보도했던, 2012년 1월3일 뉴욕 맨해튼 지하철역 한인 추락사 사고에서 보여준 인간의 행동은 비정했다.
한국인 한 모씨가 흑인남성에게 떠밀려 선로에 추락, 전철에 치일 위기에 처했을 때 프리랜서 사진기자 우마 압바시는 구조하지 않은 채 이 장면을 촬영했고, 뉴욕포스트는 이를 1면에 보도했다.
우마 압바시는 신오오꾸보역에서 행동한 이수현씨나 세키네 시로씨와 왜 다른 행동을 보였을까. 사람들은 우마 압바시를 미쳤다고 비난한다. 우리는 불특정한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인간을 보았을 뿐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인간은 초인지, 그야말로 초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몸속 DNA와 살아온 환경 때문이다.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김재호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