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아버지 통지표 기증…'꽉 막힌 역사'에 작은 물꼬

문아경씨 "정부 국정교과서 강행 보며 결심" / 전북교육청에 40점 증여 / "당시 시대상 반영 역사적 가치 높아"

▲ 문아경씨가 기증한 일제 강점기 당시 아버지 문우곤 씨의 통지표와 완주 봉동국민학교 졸업사진.

“일제강점기 당시 아버지의 통지표에는 ‘가정에서 적당한 근로를 시켜주십시오’라고 적혀 있거든요. 지금 학교에서 이런 내용의 통지서를 가정에 보냈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거예요.”

 

지난달 29일 전북도교육청 기록물 관리실에 자신의 아버지 문우곤 씨(82)의 물품 40점을 기증한 딸 문아경 씨(55·남원의료원 약사)는 ‘기증’을 넘어 ‘꽉 막힌 역사’의 작은 물꼬를 틔웠다.

 

“흑백사진 속 아버지는 참 가난하고 힘들었던 당시가 그래도 정겹다고 하시더군요.”

 

문 씨에게는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최근 물건을 정리하다가 1941년 아버지의 초등학교 입학 당시 수업료를 내면 도장을 찍어주는 봉투와 통지표, 해방 후 중·고등학교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통지서를 보면 아버지의 성과 이름 사이에 바위 ‘암(巖)’자가 추가돼 아버지 존함이 ‘문암우곤’으로 표현됐는데, 이른바 창씨 개명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문아경 씨가 전북도교육청 기록물 관리실에 기증한 1941년 완주군 봉동국민학교 1학년 통지표에는 황국 신민의 맹세와 국기를 달아야 하는 일본 경축일 등이 나열돼 있다.

 

1946년 통지표에는 ‘가정에서 적당한 근로를 시켜주십시오’라는 문구가 표시돼 지금의 학교 가정통신문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한국 전쟁이 벌어진 1950년도 당시 자료에는 2학기 성적과 출석 일수가 적혀 있는 것으로 미뤄 전시(戰時)에도 학교 수업이 진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광복 후인 1948년에는 학생들은 우정과 낭만을 쫓기도 했다.

▲ 문우곤 씨

아버지 문 씨 등 32명의 학생이 금산사를 배경으로 찍은 한 장의 흑백사진에 당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됐다. 당시 일본식 교복을 입은 학생과 현대식 양복을 차려입은 교사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사진 뒷면에는 문 씨가 ‘봄날 북중학교 제일학년 봄 원족(소풍)을 맞이하여 일생에 잊지못할 최영두 선생님을 뫼시고 금산사를 구경한 후 모악산 험한 산줄기를 오르내리며 유쾌히 놀든 그 시절 기리소 잊지말자. 영원히 잊지말자 우리들의 우정. 단기 4281년 4월 11일’이라는 내용의 친필 글귀도 새겨져 있다.

 

사진 속 주인공 문우곤 씨는 지난 1934년 완주군에서 태어나 완주 봉동국민학교와 전북공립중학교(현 전주고)를 졸업하고 전주지방법원 공무원을 거쳐 1980년부터 36년간 법무사로 근무하다 지난해 퇴직했다.

 

귀중한 자료를 세상에 공개한 딸 문아경 씨는 “자료를 보니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의 혼을 말살하려 했다”며 “지금의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는 정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자료를 기증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진과 연도를 맞춰보니 조금씩 그 시절이 어땠는지 그려진다”며 “현실을 도외시하고 정부가 역사 인식을 획일화하려는 국정 교과서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전북도교육청 김문석 기록연구사는 “기증받은 자료는 ‘영구보존기록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며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아 향후 연구와 전시, 교과서 집필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