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천지를 가리우니

▲ 박귀덕

백두산 서파 산문에 도착하니 작달비가 쏟아진다. 맑은 천지가 보고 싶어 찾아왔는데…. 굵은 빗줄기가 원망스러워 하늘만 올려다본다. 내일 북파로 올라가서라도 꼭 한 번은 천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활짝 핀 만병초가 산을 덮었다. 드문드문 쌓인 눈 덩이는 비가 내려도 녹지 않고 남아 있다. 우주선을 타고 별나라에 온 우주인 같다. 낯설고 물설다.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며 야생화를 탐사했다. 그곳의 꽃향기를 흠뻑 가슴에 담았다. 천지를 보려면 천사백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가이드는 ‘이런 날씨에 천지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씨가 변덕을 부리니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고 한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 때, 항상 망설임이 뒤따른다. 요즈음 무릎이 편치 않아 걱정 되었지만, 천지를 보러 왔으니 못 보고 내려온다 해도 올라가야 한다. 운이 좋으면 천지를 보고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한참을 지나니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우비를 입고 계단을 올라가다 일행 중 비가 내려도 개의치 않고 올라갔던 부부를 만났다. 궁금했다. “천지를 봤느냐.”고 물어봤다. 구름이 잠깐 걷혀 맑은 천지를 보고 오는 중이란다. 우리도 올라만 간다면 천지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조급해진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숨이 차오르며 땀이 흘러 얼굴에 강줄기를 만든다. 하지만 정상에 오를 기대감과 천지를 본다는 희망이 버티게 해주었다. 무릎이 허청거릴 때쯤 토라진 천지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 속에 잠겨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얼굴을 베일에 감춰두고 보여주려 하지 않는 천지를 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버선발로 뛰어오지 않아 섭섭해서 토라진 것인지, 삼대가 적선을 하지 않아서 그러는지, 아니면 만나기 싫은 사람이 와서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날씨라고 들었으면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다가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천지에서 마시는 소주의 맛을 즐기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한 번 구름 속에 감추어 둔 얼굴을 쉬이 드러내놓지 않는 천지, 전라全裸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뒤집어쓴 면사포 속에서 곁눈질만 하며 애를 태운다.

 

백두산 천지에 대한 기대와 상상이 많았다. 산골짜기에 야생화가 곱게 피어있는 그림엽서 같은 천지, 뭉게구름 떠다니는 파란 하늘이 푹 잠겨 더욱 쪽빛이 된 천지, 청노루, 산토끼, 다람쥐, 꿩이 새끼를 기르며 사는 무능도원 같은 곳,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이 시원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지는 구름이 가려 보지도 못하고, 두 손을 담구지 도 못 한 채 드센 비바람을 만나 아쉽다. 걸음이 무겁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백두산의 절경을 만났다. 구름의 조화가 경이롭다. 천지를 앞에 두고도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듯, 하늘이 밀당을 한다. 먼 산과 골짜기에 핀 야생화를 품었다가 풀어놓으며 수 만장의 수묵화를 그린다. 구름이 있어 백두산의 경치가 더욱 신비로웠다.

 

다음 날 북파에서도 어제보다 더욱 심한 구름의 훼방으로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진작품으로 백두산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찰나를 보았다. 야생화가 활짝 핀 백두산, 별똥별이 쏟아지는 순간, 하얀 뭉게구름 잠긴 천지, 해 뜨는 아침이 액자 속에서 다양한 천지를 보여주었다. 순간들을 포착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동안의 기다림과 고독, 지난했을 작가들의 발걸음이 작품 속에 스며있다. 백 번을 찾아오면 두 번 볼 수 있다는 백두산의 모습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보여 달라 조르던 내 욕심이 민망했다.

 

△박귀덕은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삶의 빛, 사랑의 숨결',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걸어오다'등을 출간했다. 작촌문학상을 수상했고 행촌 수필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