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가 대박이다. 여수 엑스포 때문에? 설정은 그렇지만 정서적으로는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여수밤바다’가 일등 공신이다. 순천에도 훈짐이 퍼진다. 순천만 정원이란 하드웨어에 내일로라는 열차 패스도 한몫했다. 전라선 열차카페는 입석승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아날로그적 향수 자극하는 전주·군산
이 열차가 일단 전주만 지나면 슬림해진다. 왜? 풍남동의 한옥 밀집거리라는 강력한 킬러 콘텐츠 때문에. 꼬치구이가 어떻고 하는 질투의 시선이 난무하지만 한복 입은 젊은 여성들의 손에 들린 스마트 폰은 전국으로 전주의 풍경을 실시간 실어 나른다. 손에는 첨단기기를 들었지만 먹고 입고 자는 데는 옛것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서해금빛열차 역시 승차율이 높다. 듣기로 열차 내에는 온돌마루와 족욕카페도 구비되어 있다고 한다. 이 열차의 핫 포인트는 당연히 군산의 근대화 거리다. 그래, 군산 떴다. 동국사에서 옛 군산세관에 이르는 길에는 단팥빵 종이박스를 든 관광객이 그득하다. 해산물이 풍부한 동네답게 짬뽕집에 긴 줄이 서고 영화 〈타짜〉의 히로스 가옥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초원사진관은 거의 순례지다.
이 모든 열차의 중심에 유네스코역사문화도시 익산역이 있다. 서해를 돈 금빛열차는 익산에서 다시 용산으로 돌아가고, 용산에서 출발한 KTX복합열차는 익산에서 절반을 분리해 여수 밤바다를 향한다. 주말 오전 10시 12분, 테트리스 닮은 익산역에 내린 손님들이 군산이나 부안으로 향하고 나면 역 광장은 다시 조용해진다.
익산역에서 내려 중앙동 오래된 거리를 10분만 걸으면 익산문화재단이 사용하는 100년 다 된 예쁜 건물이 나온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촬영한 장소이다. 원래 전주 풍남문 앞 골목에 위치한 ‘공익질옥’이라는 곳에서 촬영하기로 했는데 내부를 게스트하우스로 바꾸었기에 원형이 잘 보존된 일제강점기 시절 익옥수리조합 건물에서 찍게 된 것이다.
“이 붉은 색 벽돌 건물은 1950년대 대한체육회 건물로 영화 속 그림을 잡으면 좋겠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의 영화제작자 차승재가 익산문화재단 건물을 보고 한 말이다. 늦가을 익산영화인문모임 강의를 마치고 KTX로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 익산 시내 뺑뺑이를 돌렸다. 중앙동 삼산병원 우아한 근대건물부터 20세기 키치모텔에 이르는 ‘그때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세트가 필요 없는 거리와 건물들에 살집이 가득한 이 영화제작자가 스위스 월드컵 영화의 장면들을 기획한다고 나는 믿었다.
미륵사지와 왕궁탑은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열차로 움직이는 청년들은 손 내밀면 다가설 수 있는 삼촌과 형님의 역사가 궁금한 것이다. ‘응팔’ 시리즈가 그것을 증명하고 역사선생 설민석이 뒤를 받친다. 하여 젊은이들은 래퍼 개코와 광희가 부른 윤동주를 담은 ‘당신의 밤’을 랩으로 흥얼거리는 것이다. 디지털세상일수록 아날로그적 향수를 자극하는 전주와 군산을 찾는 이유다.
익산도 근대화 시간여행 공간 되길
전주와 군산에서 초코파이와 단팥빵을 산 손님들이 이곳 그때 거리를 꼭 다녀가면 좋겠다. 부러우면 진다고 하지만 훈짐으로 묻어가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여수밤바다가 뜨니 순천 벌교가 함께 떴다. 옛날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그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 전주와 군산에 이어 익산이 근대화 시간여행의 ‘세트’로 함께 뜨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신귀백 씨는 전북독립영화제 조직위원이며 장편다큐멘터리 〈미안해, 전해줘〉를 감독했고 저서로는 〈영화사용법〉 〈전주편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