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란 전화를 받았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였다. 그런데 수술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수술을 했을까?’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내내 가슴이 조여 왔다. 예상치 못한 병에 대한 두려움이 무겁게 밀려온다.
그의 부인이 간병하고 있었다. 푸석한 모습들, 친구의 얼굴은 야위고 초췌했다. 핏기는 없으나 눈빛은 형형(熒熒)하였다. 급할 것도 없어 천천히 물어보았다. “무슨 수술을 했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쓸개를 떼어냈다고 대답하였다.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된데?” 판에 박은 소리지만, 그 말 외에는 적당한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쓸개 하나 떼어내도 사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데.”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친구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쓸개 없는 놈 되었어야.”
“그래, 나이 먹으면 쓸개가 없는 듯해야 돼. 그리고 너는 본래 쓸개가 없는 놈이었잖아!” 우리는 병원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어댔다. 농(弄)은 그렇게 해도 친구나 나나 씁쓸한 웃음을 웃고 있는데, 친구의 부인이 수술결과가 좋다는 등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여 주었다. 끊어지다 이어지다 이야기는 반복되면서 시간은 흘렀다.
친구는 가끔 창밖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름살이며 희어져가는 머리카락이 묘하게 햇살에 처량한 빛을 몰고 왔다. 병원 뜨락에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단풍들고 낙엽지고, 앙상한 가지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가랑잎이 친구의 얼굴과 겹친다.
이 친구는 나와 유독 가까이 지냈다. 군에 입대하기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놀다가 군용열차가 논산훈련소로 떠날 때까지 역전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고, 9개월 9일 간의 짧은 군대생활이었지만 제대 후 제일 먼저 찾은 것도 그였다. 직장도 함께했다. 같이 가서 시험을 보자고 했다. 친구는 “네가 먼저 들어가서 근무해보고 좋으면 말해.”라고 하여, 교육 받는 동안 시험이 있기에 원서를 사서 친구의 집에 보내주었다. 그는 바로 합격하였고, 30여 년이 넘도록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항상 나보다 생각이 깊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먼저 소식을 전하는 건 대부분 그였다. 혹여 내가 먼저 소식이라도 전할라치면, “야, 너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구나.”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항상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고 농을 했다. 나보다 생일이 좀 빠르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간에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는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한다. 만나면 별로 할 말이 없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궁금하고 만나고 싶어진다. 술은 고작 몇 잔이면서도 항상 나보다 더 마신다고 장담한다. 서로 언짢은 말을 해도 그러든 말든 한다. 그는 늘 나에게 작고 아담한 푸른 소나무 같은 존재였다. 특별하지는 않으나 60년을 이어온 끈끈한 우정이다.?
그와 나는 대나무막대기를 타고 놀던 죽마고우(竹馬故友)는 아니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중과 포숙아 같이 혜안(慧眼)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희생하여 후세에까지 우정의 표상이 된 관포지교(管鮑之交)도 아니다. 그저 무덤덤하게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참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벗은 나이나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험한 인생길에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벗이 될 것이다. 좋은 벗은 조건이나 상대방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이 좋은 벗이 되어야 한다. 그만큼 순수한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와 나는 가슴속 꽃잎들을 꽃으로, 열매로 결실을 맺어가는 친구다.
‘벗은 현실이요, 우정은 이상이다’라고 했다. 벗은 눈앞의 꽃이라면 우정은 무화과처럼 안으로 피우는 꽃이다. 생각해보면 그와 내가 같이한 지난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앞으로도 살아생전 현실의 벗으로 영원한 우정으로 계속 이어갈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가 있어 든든하고 행복하다.
△이명철 수필가는 1999년 〈지구 문학〉으로 등단, (사)한국문인협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이며 고창문인협회 제 8대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는 〈학교-지역사회연계 문화예술프로그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