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하면 80’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절이다. ‘강녕하면 100세 넘게 살 수 있다’는 오만이 있다. 그런 마당에서 50대에 불과한 대학동창이 지난해 불현듯이 떠났다. 너무 갑작스러워 미국에 있는 가족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 요절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지만,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숙연하고, 아쉬울 뿐이다. ‘다시 한 번’이 없는 단 한 번 뿐인 삶, 언제 생이별을 고할지 모르는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친구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 고향을 찾은 그를 잠깐 만났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와 대화하면서 그가 독실함을 넘어 지독한 크리스찬이란 생각이 들었다. 낯선 이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천국을 꿈꾸고 있었다. 정작 자신도 생활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하는 처지이면서 ‘거리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고단한 삶이 그를 단명으로 내몰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는 떠나면서 작은 일력을 건넸다. “믿든 믿지 않든 좋은 말씀이니까 읽어봐라.” 그리고 총총히 가버렸다.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됐다. 정유년 1월이 다 지나가는 엊그제, 책상 한 켠에 놓여 있던 성경 일력을 펴보았다. 1월1일 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구약성서 예레미아 편에 나오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무슨 말이 있었는가를 알아야 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 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그 여호와의 말씀이 일력에 소개된 ‘렘18:6’이었다. 그 아래에는 크리스찬이 아닌 필자같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 글이 붙어 있었다. 요약하면, 남미에서 활동한 엘리엇이란 선교사가 인디언 등을 선교하기 위해 선교회관을 짓던 중 큰 홍수가 나서 모든 시설물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엘리엇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그날 아침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기도가 들어 있는 선교회관을 휩쓸어가는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너의 하나님이다. 지금도 너는 나를 신뢰할 수 있느냐?’ 이제 나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굴곡많은 삶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는 구약성서 예레미아 18장6절은 기독교인 여부를 떠나 동서고금을 통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릇 세상일이란 것이 확실한 신념과 긍정적 태도를 가질 때 좋은 결과물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정유년은 나라 안팎으로 우울하다. 1월20일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와 반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 이익 우선주의 앞에서 한미FTA 재협상도 현실화 될 가능성이 커졌다. 250억 달러를 넘나드는 우리 이익이 축소될 수 있다. 사드 때문에 중국과 불편해진 상황에서 트럼프의 강공이 이어지는 건 설상가상이다. 북한의 핵개발, ICBM은 상시 위협이다. 제반 주변 환경은 악화일로인데 탄핵 정국과 대권 경쟁으로 어수선하다. 전북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완전폐쇄 충격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일자리와 임금이 줄면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로맨스는 사라졌다. 팍팍함과 건조함, 이기심, 출세탐욕이 지배한다. 뻣뻣함만 드세고, 나긋나긋함이 사라졌다. 백세시대라는 상업적, 정치적 수사는 사치다. 을과 병에겐 그저 씁쓸하고, 시니컬할 뿐이다. 그럴수록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준비하고, 수고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