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작동하고 있다. 한국은 최고 권력자도 최고 부자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나라이다. 목하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을 수사 중이며, 탄핵이 용인되면 구속될 수 있다. 현하 최고경제권력자인 삼성그룹부회장을 구속수사 중이다. 이 모든 것이 여론과 법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법치주의를 향해서도 한 단계 앞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역사는 항상 직선으로 전진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TV 앞에 모여서 분노하고, 촛불집회에 참석해서 잘못된 것에 대해 제대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뭇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혼란스런 상황이 올 수 있다.
축제분위기 속에서 나라가 잘 되길 소리 모아 외치는 것만으로 이 나라 정치가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 나라 민주주의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인지 기억을 되살려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흘린 피와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양극화를 해결하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것만으로 경제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 나라 경제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지도자들의 지혜와 기업가들의 용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타는 목마름도 풍요로운 사회를 향한 절박한 배고픔도 사라졌다. 공무원들은 엎드려 움직이지 않고, 젊은이들은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연구자들은 정부예산 받아서 보고서 내는 걸 업으로 삼고, 민간 기업들은 큰 기업 작은 기업 할 것 없이 정부지원에 기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할 사람들 사이에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 대선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은 보여도 안보와 경제를 책임질 준비를 제대로 하는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쉬운 것은 보수든 진보든 진부한 노선을 따라 앵무새처럼 떠드는 일이다. 어려운 것은 실용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전략을 세우고 실천을 뒷받침할 현실적 정치세력을 모으는 일이다.
경제면에서 가장 큰 과제는 혁신이다. 현재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재벌체제 안에서의 혁신은 한계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수긍한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재벌을 개혁하고 벤처기업 중심의 창업경제를 하겠다고 나서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벌경제로 돌아가는 게 지금까지의 패턴이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민간투자를 기반으로 한 벤처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재벌개혁 이전에 시장이 작동하는 벤처생태계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개혁이 우선이다. 소수 재벌이 경제를 지배하는 체제가 타파되어야 벤처생태계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겠지만 한국경제를 혁신하려면 그 길 밖에는 활로가 없다.
벤처 정신은 목마르고 배고픈 정신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에 뛰어드는 정신이다. 민주주의는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