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주시민간기록물 공모전에서 눈길을 끄는 탁본첩이 있는데, 바로 이부용씨가 출품한 어사묵전(御賜墨氈)이다.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어사묵전에는 고종황제가 쓴 조경단비, 오목대비, 이목대비와 전라관찰사 이완용이 쓴 완산비 4개의 탁본이 서첩의 형식으로 묶어져 있다.
여기서 어사묵전의 전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로 원래 모전(담요)이란 뜻인데, 문맥상으로 연결되지 않아 ‘깔아 펼친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사묵전의 원소장자는 이부용씨의 할아버지인 수당 이덕응 선생이다. 수당 이덕응은 전주이씨 선원계로 1900년 궁내부판임관을 재직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김제 백산면 대목리로 낙향했다. 이후 그는 잠시 목조대왕이 살았던 전주 한옥마을인 자만동에 우거한 후, 1909년 진안 주천면 대불리로 옮겨 화양도원이란 강학당을 열었다.
이덕응은 우국충정의 정신으로 고종황제를 흠모했으며, 필자가 생각할 때는 이 탁본들은 1900년경 처음 비석이 건립될 때나 이덕응이 전주 자만동에 살았던 1908년 즈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대를 올려 잡는 것은 탁본을 한 한지의 질감과 색깔에서 세월의 풍모를 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종황제의 문집인 주연선집의 비기부분에는 어사묵전에 실려 있는 조경단비의 음기와 오목대비의 음기가 모두 실려 있다. 조경단비에는 건지산의 내력과 시조 사공공의 묘소임을 강조하고 있고, 오목대비에는 ‘오목대는 전주부성이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오목대는 실로 눈썹과 눈같은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들은 모두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만, 완산이라 전서로 쓴 비석은 현재 비석의 행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완산은 매우 중요한 산으로 전주부성의 봉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묘소를 쓰는 것과 벌채하는 것을 금한다는 의미로 완산비를 세웠던 것이다. 자료를 수집해 보니 이 비석의 위치는 정혜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전북대로 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전북대 박물관에 소장되지 않고 있다.
전주를 풍수적으로 볼 때 온전한 물길로 표현하면 전주이고, 바람의 피해가 없는 고장으로 보면 완산인 것이다. 즉 한 여름에 태평양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정읍 갈재에서 막아주고 모악산과 경각산을 거쳐 전주쪽으로 올 때 마지막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산이 있으니 바로 완산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완산동에는 일본인들이 한명도 살지 못했다 한다. 전주의 선비들이 철저히 동토난다 해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완산의 힘이 아닌가! 전주사람들은 자주 완산에 올라 완산의 기를 한 번 받아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