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문화예술계는 막 폭로되기 시작한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이미 격앙되어 있었지만, 도대체 이런 일을 누가 왜 벌였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왜 벌어졌는지, 비로소 일목요연해졌다. 우리나라는 정상 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병든 권력으로 인해 국가의 곳곳에 병원균이 창궐하고 있는 나라였다.
10월 26일, 전북작가회의는 문화예술계에서는 가장 먼저 “박근혜를 탄핵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가 발표되자 ‘발언 수위가 너무 높다’라거나 ‘현재 정치 지형상 탄핵은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었지만, 우리로서는 우리들의 분노를 감출 방법도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1974년 박정희 군부 독재에 맞서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가회의는 출범 초부터 각종 필화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왔다. 자연스럽게 맷집도 강해져 어지간한 일에는 그리 놀라지도 않는 편이다. 그리고, 정권의 핍박이 있을 때마다 함께 분노하고 문인들을 감싸준 국민들의 성원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선 이후, 작가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게 최근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블랙리스트’였고, 그뒤에는 ‘문화 융성’이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문화 말살을 기획하고 있던, 음흉한 리스트 작성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겨울부터 올 봄까지 우리 국민들은 그야말로 길거리에서 민주주의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들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 절차적 민주주의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인지, 형식적 민주주의의 가면 아래에서 숱한 악행들이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는지…. 작가들 또한 깊이 반성했다. 저런 부류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작태를 외면한 결과가 저들로 하여금 블랙리스트를 만들게 했다는 것을!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때만이 비로소 백화제방의 민주주의 사회가 꽃을 피운다.
바야흐로 봄이다. 4.19, 80년의 봄, 87년의 봄… 봄은 언제나 본질적인 변화, 혁명이 예비되는 순간이었다.
올 봄 한국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향해, 우리 모두 담대한 도전의 첫걸음을 뗄 시점이다. 엄밀히 말해 이제야 시작인 셈이다.
또 바란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탄핵을 당하고도 소름 끼치는 웃음을 내보이며 불복 농성 태세에 들어간 이가 있다. 국민 대다수의 바람과 달리,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 또한 틈만 보이면 머리를 내밀고 다시 준동할 것이다.
올해 봄은 그저 맞이하면 되는 계절이 아니라 눈 부릅뜨고 발견하고 감시하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새로 보고, 다시 보고, 멀리 봐야 한다.
봄에는 막 기지개를 펴는 생명의 약동으로 인해 소란스럽다. 소란스러운 봄을 기대한다. 민주주의는 시끄러워야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