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는 후백제 견훤왕이 아들 신검에게 유폐 당했다는 장소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자 금산사 경내 유폐장소에 대한 고증을 검토하기로 했다.
이 같은 논란은 견훤과 신검 부자 간 관계에서 과연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 하는 미륵전 지하실에 가두어야 만 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혹자들은 미륵전 지하실이 아닌 현재 큰스님 및 주지스님이 거처 하고 있는 공간에 감시를 받으며 지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백덕규 김제시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삼국을 통일 하여 천년왕조를 이어간 신라가 국가적 폐단이 극에 달해 국운이 사양길에 접어들 무렵 서남해상의 방어를 맡고 있던 견훤은 백제 후계자임을 자처 하고 후백제 왕이 됐다.
그는 신라 20여성을 공략 하고 경주를 급습,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키는 등 후삼국시대의 최대강자로 부상했으나 고려 왕건과의 최후 결전이었던 운주(지금의 홍성)싸움에서 참패당하자 후백제의 요새인 웅진(공주) 이북의 30여성이 왕건에게 항복했다.
나이 일흔으로 연로한 견훤은 크게 상심, 아들 10여명 중 가장 뛰어난 4남 금강에게 양위하려 했다. 이에 장남 신건은 4남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는데 결국 부자간 반목으로 후백제는 고려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다.
금산사에는 이를 증명하듯 견훤과 얽혀있는 설화가 상당수 이어져 오고 있는 가운데 금산사지에는 금산사 5층석탑을 견훤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금산사 입구에는 금산사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고 하여 견훤성이라 불리우는 성터와 홍례문이라 불리는 성문도 존재하고 있다.
김제시는 이에따라 견훤이 유폐된 장소를 규명하고 스토리텔링 자원화를 확보, 미륵성지 금산사에 대한 바로알기 및 관광자원화를 꾀한다는 방침이다.
이건식 김제시장도 이 같은 내용에 많은 관심을 갖고 담당 공무원들에게 자료 검토 및 고증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덕규 학예연구사는 “역사의 빈공간은 밝혀진 역사의 맥락을 통한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빈 공간은 메꿔질 수 있다”면서 “견훤이 가장 총애 하는 금강을 죽인 신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던 점과 유배가 아닌 감금의 의미가 있는 유폐로 기록된 점, 금산사 사적에 기록된 점을 고려한다면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 미륵전 지하실에 유폐했다는 가설을 세워 검증 하고 정설화 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