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에게 친구란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를 의미한다. 현대인은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답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속에 함축된 의미에 인식을 같이하려면 공감이 가는 객관적 전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사람의 관계가 뭇 이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자유는 순수한 자신의 의지의 산물, 즉 자율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
감정, 내가 주체로 존재할 때 의미
마이클 샌델이 ‘정의’를 강의하면서 설명했던 칸트의 ‘도덕적 가치’를 떠올리며 나름의 접근의 틀을 정리하고 보니 인디언들이 말하는 그 친구라는 의미에 가까워진 듯하다. 이질적인 언어와 관습일지라도 지향하는 선과 가치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을 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신비한 공감과 감동을 준다. 자연의 일부로 사는 인디언들의 단순하고 진솔한 삶이 가끔 그렇다. 친구의 의미가 그 중 하나이다. 그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으로 보라”는 선문답 같은 말도 한다.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는 너일 수도, 나일수도 있다. 어떤 연유로 누군가에게 내 슬픔이 공유되기를 기대한다면,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 사람에게 나의 등을 내어줄 수 있는지를. 또 내 슬픔을 등에 지게 한 자는 짊어진 자보다 마음이 편안할리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슬픔은 너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너의 손을 잡는 쪽이어야 한다. 이 말이 너의 슬픔을 바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최적의 사람관계가 유지되려면 영향력과 소유의 분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서로에게 거는 기대는 상식적이고 경계의 선을 흩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란 의지와 다르게 불균형하게 설정되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또 일상은 푸시킨이 일깨운 ‘삶’의 한 구절처럼 희망을 가져야 하는 부대낌의 연속이다. 결국 인디언이 말하는 개념의 친구는 지금의 우리에겐 어쩌면 이상에 가깝다. 그것은 선언적인 일종의 공동체적 신념과도 같은 것이어서 현대인의 개인주의적 성향에서는 보편적일 수 없다. 그러나 기대치가 낮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의 슬픔을 기꺼이 너의 등에 지고 가는 이웃, 또 너의 슬픔을 조건 없이 나의 등에 나누는 그런 거룩한 이름들이 이따금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인디언들은 친구를 말하면서 ‘너의 슬픔’도 있는데 왜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기쁨’도 있는데 왜 ‘슬픔’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정한 감정이나 행위는 내가 주체로서 존재할 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공통적 사고이고 인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기쁨은 그 자체로서 치유가 필요 없는 나눔의 대상이 아닌가.
사람관계, 역지사지 자세 우선돼야
하루가 다르게 신록의 싱그러움이 더하는 4월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구름 아래 맴돌던 종달새 울음이 그리운 계절이다. 가까운 숲에서 들려오는 해마다 이맘때에 찾아오는 귀한 나그네, 휘파람새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청량하다. 그 종달새처럼 정겹고 휘파람새 소리의 울림처럼 맑은 사람, 가끔 반문하고 확인하면서 내 아픔을 자기의 일처럼 아파하는 한 친구가 있다. 오늘 그의 헌신과 신념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생각을 가다듬는다. 진정한 친구는, 대지를 어머니라 부르는 인디언의 공동체에서든 첨단과학의 문명사회에서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또 경험적 측면에서 사람의 관계는, 주체든 객체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할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