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순은 1938년 ‘동광신문’에 시조 ‘생명이 끊기기 전에’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그는 이병기의 가르침대로 시조를 현대화하는 일에 고심하였다. 그는 일체의 기교를 멀리하고 진솔한 심성에 비친 진실한 정감을 정직하게 형상화하느라고 노력한 시인이다. 1952년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발행하였고, 한국시조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시조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열성이었다. 1985년 ‘한국시조큰사전’을 상재하여 시조를 종교로 숭앙하던 신념의 일단을 선보였다. 이 사전으로 기존의 한국 시조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고려말에 시작된 이후의 역사를 정리하게 되었다.”
구름재 박병순 선생(1917~2008)에 관해 문학평론가 최명표씨가 2011년 본보에 연재한 글(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일부다. 그가 생전에 자신의 비문으로 남긴 시 ‘비명(碑銘)’은 그의 일생을 더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글을 사랑하고 시조를 종교하는 민족 시인으로 가람의 뒤를 이은 한국의 별로 살다 간 가냘프고 고달픈 순결한 대한의 교육자였다’.
구름재는 평생 서기 대신 단기를 썼고, 교단에 오를 때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글날을 문화의 날로 선포해야 한다고 청와대에 탄원서를 냈다. 전주상고, 전주고, 남원농고, 이리공고, 전주공고, 진안농고, 전주여상, 전라고, 임실고 등에서 40년간 평교사로 학생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자신이 소장하던 장서 1만여권의 장서를 한양대에 기증했다. 생전에 애국자로, 한글운동가로, 시조시인으로, 교육자로, 장서가로 기억되길 원했을 만한 족적들이다.
구름재의 이런 문학적 자산을 후배 문인들이 귀히 여겨 지난해에는 진안 부귀의 생가를 복원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생가 복원을 위해 2011년 추진위원회가 구성됐으나 사업비 확보를 못해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추진위를 재구성해 어렵게 복원작업을 마무리했다. 고향과 전북의 문인들이 도리를 한 셈이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27일 열리는 ‘2017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 구름재 박병순을 선택했다. 시인 윤동주·이기형·조향·최석두, 소설가 손소희와 함께다. 2001년부터 열어온 탄생 100주년 문학제에 채만식(2002)·신석정(2007)·김환태(2009)·서정주(2015) 등이 이름을 올린 전북 출신 문인들이다.
구름재의 문학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김원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