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을 흔히 인물의 고장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린 고창 출신의 정치인, 관료, 문인, 예술인들이 즐비하다. 그 중 고창이 낳은 대표적 인물이 인촌 김성수와 미당 서정주다. ‘친일’로 낙인찍히기 전까지 이들 두 인사는 고창의 자긍심이었다. 두 인사가 고향에 남긴 유무형의 유산은 넓고 깊다.
고창군 부안면 출신의 인촌 김성수(1891~1955)는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한국전쟁 때인 이승만 정부에서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때 그가 설립한 동아일보와 고려대가 지금도 건재하다. 경성방직의 설립자도 인촌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정치·경제·언론·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이렇게 큰 자취를 남긴 이도 많지 않다.
인촌과 같은 부안면 출신의 미당 서정주(1915~2000)는 한 때 ‘국민 시인’으로 통했다.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서정주는 시의 정부다(고은 시인)”, “부족 방언의 요술사(유종호 교수)”,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시인(김재홍 교수)”이라는 별칭과 찬사가 따랐다. “정치적으로는 옳지 못했으나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남긴, 문제적 인물 미당은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소설가 김영하씨가 미당을 이렇게 정리했다.
미당의 문학적 성취와 몇 편의 친일시 및 80년대 신군부 찬양 등의 행적 사이에 고향 고창에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미당을 기리기 위해 추진됐던 미당 시문학제가 취소되고, 질마재문화축제가 미당을 기리는 행사로 근근이 유지되는 정도다. 생가에 만든 미당시문학관 또한 지역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이 지난달 인촌 김성수에 대해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판정하면서 미당과 비슷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다. 대법원 판결 이후 서울시는 서울대공원 내 김성수동상 철거를 심의할 예정이며, 고려대 학생들은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고창에도 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는 인촌 생가가 있고, 인촌로가 도로명으로 사용되고 있어 향후 ‘인촌 지우기’논란이 예상된다.
대법원이 판정한 반민족친일 행위를 누구도 덮거나 감쌀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전북의 대표적 인물을 하루아침에 무작정 내칠 수도 없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공과 과를 함께 큰 품으로 안았으면 좋겠다. 그게 고향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