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망월동 국립묘역에서의 눈물

▲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
그 날을 생각하며 나는 도무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를 더욱 울린 것은 37살의 유족 김소형의 ‘슬픈생일’ 추모사였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껏 참 행복하게 살아 계셨을텐데… 하지만, 한 번도 당신을 보지 못한 소녀가 이제 당신보다 더 커버린 나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을 이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 전에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갈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셨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김소형씨의 아버지 김재평(당시 29세)씨는 완도수협근무 중 김소형씨가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광주의 한 산부인과로 향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했다.)

 

1980년 당시 필자는 제10대 국회의원 비서관 및 신민당 정책위원의 신분이었다. 1979년말 독재정권은 절대권력의 절대부패로 인해 권력자의 내부 암투로 대통령이 피살되어 국민들은 민주화의 봄을 기다리며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지도자 선출의 새 시대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10대 국회를 강제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김대중 선생 등 민주인사들을 긴급 체포·구속했다. 그러자 전남·광주의 시민·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연좌 농성 등을 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80년 민주항쟁이 시작됐다.

 

그해 5월 17일 토요일 0시를 기해 확대된 계엄령은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5·18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버렸으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 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결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민주화의 횃불로 지켜주고 있다.

 

1980년 5월 말경, 광주 민주화운동 참상이 서울에 알려지고 권노갑(당시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유훈근 비서, 미국·일본 대사관의 참사관 등이 광주 현장을 조사하러 가자고 해 필자도 동참하기로 하고 중구 정동 당시 문화방송 앞 정의집에서 만나 출발키로 했다. 그러나 권 실장 등은 긴급 수배로 나오지 못하고 외교관과 필자만 광주 현지로 출발했다. 현지에서 재야 지도자이자 인권변호사인 홍남순 변호사의 차남 전남대 송기숙 교수, 시민군 대표, 순창출신 정운본씨 등 광주시민 피해자 가족을 만나 광주의 선량한 시민·학생 학살의 참상을 조사·확인했고, 외국언론에 ‘광주의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필자는 이 때문에 구속돼 심한 고문을 받게 됐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주변 지인들도 감시와 조사를 받았다.

 

올해 37주년 기념식 현장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참여자, 유가족, 광주·전남시민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 정세균 국회의장, 각 정당 대표 및 국회의원 등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대통령도 국회의장도 국회의원, 유가족, 시민들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서 뜨거운 눈물을 다시 흘렸다. 삼가 5·18민주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