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 14년, 갈길 먼 가정위탁제도 ① 현장] "아이들은 비싼 신발이 아니라 '예쁨' 받고 싶어해요"

10년 동안 네 아이 입양·수탁한 손정자씨 "독립 앞두고 일자리 찾는 모습 마음 짠해"

‘남의 자식’을 성인이 될 때까지 내 가정에서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지난 2003년 가정위탁제도 시행을 통해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워 키울 수 없는 아동을 만18세까지 대리가정을 마련해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기준 도내에서 진행 중인 일반위탁은 40세대 54명에 불과하고, 정부의 지원금도 제자리걸음이다. 전북지역 가정위탁 보호의 현장과 실태 등을 2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생면부지인 아이들의 엄마가 되는 것이 망설여졌다.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아이를 만나러 간 집에서 아이들을 둘러싼 술 냄새 찌든 낡은 골방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10여 년간 3명의 아동을 위탁하고, 1명을 입양한 손정자 씨(63·전주시 호성동) 이야기다.

 

손 씨가 전북가정위탁지원센터의 도움으로 두 남매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008년 익산시의 한 주택가였다.

 

창고로 쓰는 건물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두 아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술 냄새가 가득한 어두운 공간에서 뽀얀 얼굴의 11살 누나와 10살 남동생을 마주한 손 씨는 가슴이 찡해졌다. “엄마가 필요하겠네…”

 

‘친인척 위탁’과 달리 생면부지인 남의 아이를 맡는 ‘일반 위탁’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낯선 집으로 이사와 말을 걸기도 쑥스러워했던 남매가 어느 날 손 씨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어느 날 새벽에는 술을 마신 뒤 자식들이 보고 싶어진 아이들의 친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아빠가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던 날이면 행여나 맞을까 두려움에 떨었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거절했다.

 

손 씨는 정읍 출신으로 1987년 결혼해 전주에서 아들과 딸을 낳으며 평범한 가정 주부로 살아왔다.

 

아들과 딸이 스무 살을 넘기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인 지난 2006년 영아원에서 3세 남아를 입양해 친자로 받았다. 1년 뒤에는 이혼가정에서 갓 태어난 여아를, 이듬해에는 창고에서 지내던 남매를 데려왔다.

 

50대에 ‘아이의 엄마’가 된 손 씨가 초등학교를 찾았을 때 할머니처럼 보였다지만, 더 의욕적으로 학부모 운영위원회에 참가해 ‘젊은 엄마’들과 직접 부딪치며 무엇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지 고민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에 다니는데, 우리 아이들만 안 보낼 순 없잖아요. 영어·수학학원을 보내려니 학원비, 책값, 간식비까지 한 달에 50만 원씩이 나가더라고요. 다른 데서 돈을 아꼈죠. 정부에서 매달 지원되는 돈은 12만 원인데 돈 생각하면 못키워요.”

 

세월이 흘러, 처음 위탁한 여아는 재혼한 친아버지에게 돌아갔고, 남매 중 누나는 만 18세에 위탁 기간이 끝나면서 독립했다.

 

현재 손 씨는 전주시 호성동에서 남편과 시어머니, 입양 아들(14), 위탁 아들(18)과 함께 살고 있다.

 

손 씨는 “고3인 위탁 아들이 졸업을 하는 내년 2월 28일이면 위탁기간이 만료돼 우리 집을 떠나야 한다”며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현장실습을 나가고 있는데 대학보다 취업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예순을 넘겼지만, 손 씨는 또다시 누군가의 ‘엄마’를 꿈꾸고 있다. 입양은 만 50세라는 나이 제한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위탁은 힘이 닿는 한 계속 해볼 생각이라고 한다.

 

손 씨는 “위탁 아이들은 비싼 신발·가방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예쁨’을 받고 싶어 한다”며 “평생은 아니지만, 위탁 아동들이 성인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