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 바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엄마가 이불을 꿰맬 때 가까이 다가가다 큰 바늘에 발바닥을 깊숙이 찔려 아주 혼났었거든요. 얼마 전 어떤 집에서도 엄마가 바느질에 푹 빠지다보니 아이가 바늘에 찔려 큰일난 적이 있고요. 바느질 할 때 항상 조심하시고 아이가 있을 때는 안하는 게 좋아요.”
“우리 어렸을 때도 보면 엄마들은 뭐든 절대로 안 버리잖아요. 왜 버리나, 필요할텐데, 이러면서요. 근데 정작 필요할 때는 못 찾아! ㅎㅎ”
△버려지는 자투리천들을 이쁘게 꼴라쥬한다
입으로는 수다 중이고 손으로는 헝겊조각들을 쪽모이하는 패치워크 감성을 키우느라 정신없다보면, 혹여 바늘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지라 강사 류정희 씨가 조심스럽게 당부한다. 그 와중에도 수다는 계속된다. 수더분해 보이는 한 여성은 섬세하게 짜여진 바느질 요령 그림을 유심히 살피면서, 자투리천들을 활용한 꼴라쥬 작업에 몰두한다.
화요일 오후, 여남은 여성들이 온갖 수다를 떨며 손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곳은 남원시 산내면에 위치한 문화기획 달이다. 문화기획 달은 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주최하는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블루밍 : 살림-바느질이 바꾸는 삶’ 프로그램(이하 블루밍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산내면의 젊은 여성들이 업사이클 작업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자아실현을 이루어 나가자는 발상으로 기획되었다.
이들에 있어서 업사이클은, 업그레이드(Upgrade)와 재활용을 뜻하는 리사이클(recycle)을 합친 단어지만, 더 의미있고 더 멋있게 일상의 버려지는 것들을 재활용한다는 뜻을 담아내고 있다. 이들의 수다도 어쩌면 그 조각들의 하나다.
△가정을 탈출한 해방구, 자아실현의 기회
2004년 산내에서 방과후 수업을 하기 위해 대구에서 건너와 어영그영 여기 살다보니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김현정 씨는 블루밍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그림그리기 재주를 발견했단다. 프로그램 기획자이자 달의 활동가인 달리 씨는 업사이클 작업에서 미적 감수성을 중시하여 초반에 그림그리기 교육을 배치하였다.
달의 또다른 활동가인 자정 씨가 강사로 진행하였고, 이때 김현정 씨가 그린 그림이 너무 예뻐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동네분이 가게 이미지로고로 사용하겠다며 자기한테 팔라고 했단다. 김현정 씨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니 기분이 좋고 재밌다고 한다. 마을 여성들 중심으로 꾸려진 커뮤니티 재활용공방 살림꽃을 운영하는 강사 류정희 씨의 말이다.
“저는 귀촌한 지 15년째라 이제는 귀촌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선주민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애매한데요, 더군다나 오래된 귀촌자들은 살림과 가정일에 묻혀 살아왔잖아요, 그런 분들은 가정을 탈출해 일종의 해방구를 만끽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프로그램 호응도가 아주 높아요. 집안일 스트레스의 해방이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거든요.”
△공동체에 희생되는 개인의 삶 새롭게 이슈화
블루밍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산내면과 인접지역에 사는 30-60대 여성들 15명이다. 도계 넘어 경남 함양의 마천에서 오는 사람도 둘이나 된다. 자동차로 10분 거리라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단다. 그러고보니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지리산 산자락에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는 귀촌여성들이다. 자연 환경이 좋아 모여들었을 사람들일텐데, 이곳에서 이들의 삶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산내면은 귀촌자들이 무척 많아 이러저러한 단체들도 많고 지역사회 활동량도 크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공동체라는 커다란 프레임에 갇히다보니 부지불식간에 ‘공동의 삶’으로 환원되는 공동체 담론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어 ‘개인들의 다양성’이 숨쉬기가 어렵지 않았냐는 것이 달 사람들의 판단인 듯 하다.
이런 맥락에서 달의 활동가인 이리 씨는 “공동체보다도 개인의 일상적 표현활동들이 아름다우며 그래서 더 중시되어야 하고 그 소통과 공감의 장이 곧 블루밍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한다. 달리 씨도 가족중심주의 문화, 지역기반 공동체주의 문화에 개인의 욕망과 삶이 희생되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보인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개인이란 곧 공동체주의에 묻혀버리지 않는 여성들의 일상적 삶으로 이해된다.
△이런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도 되네?
문화기획 달은 달리, 자정, 이리 씨, 이렇게 셋이 꾸려나간다. 4년 동안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지역독립잡지 계간 지글스 발간, 여성 글쓰기 포럼, 마을 빵동아리 운영,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공동체라디오 제작교육, 페미니즘 아트스쿨 등등이다. 스스로를 ‘지리산 자락 마고여신의 생명력과 사랑을 창조성으로 꽃피우는 여자들의 즐거운 작당소’로 정의하고 있다.
공동체성과 남성성이 강한 지역사회에서 잡지 지글스는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시되어 왔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어찌보면 자연스럽게 억압받았던 여성들의 일상 이야기, 이름하여 페미니즘 활동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도 되는구나, 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는 것이다.
지리산 산자락의 위엄(?)에 묻혀 생태적 삶의 모태라 할 수 있으나 정작 실종되어 온 여성성 담론, 이제 일상의 부드럽고 섬세한 화두로 말건네기를 하는 달의 이런 활동들이 지역에 사는 남성들에게는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활동의 연장선인 블루밍 프로그램 참여에 대해서 남편들의 반응도 좋고 엄마들의 감성이 표현된 작품들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엄마들은 자존감을 얻는다고 한다.
△여성성의 리듬, 우리 모두의 것
“주부여성들의 일상이 바빠요. 일주일에 한번 한나절을 투여해 여기에 오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그 와중에 참여해 존재감과 해방감을 찾는 거죠.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이라 이런 기회가 굉장히 소중하다고 보니까요. 초반에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그림그리기를 했는데 3시간씩 하다보니 사람들이 지쳐 쓰러지더라고요 처음에는 자기 그림들이 못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서로 너무 감탄하는 거예요. 자기만의 스타일을 표현한건데, 못 그렸다고 생각한거죠.”
블루밍 프로그램과 달의 활동은 여러 키워드들이 중첩된다. 무엇보다도 자투리천과 같은 일상의 것들을 재활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재활용돼 나오는 생산물은 미적 감각에 기반해 참여자 각자의 창의적 가치와 시선의 새로움을 높이고자 한다.
지리산 산자락의 무수한 콘텐츠의 원천들 및 일상들과 소통하려는 여성성의 리듬이랄까, 그래서 그 여성성 리듬은 우리의 삶을 재디자인하는, 사실은 아저씨-남정네들도 즐겨야 할 우리 모두의 것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