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차바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난해 10월,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러 나선 고(故) 강기봉 소방관이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평생을 소방관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등을 따라 소방관이 된 청년은 그렇게 운명을 달리했다. 본래 부상자의 응급치료를 담당하는 구급대원인 강 소방관은 부족했던 구조대원 인력을 대신해 구조활동을 돕다가 참변을 당했다. 인명구조를 담당하는 구조대원이 충분했다면, 그래서 강 소방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고였다.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소방관의 평균 수명은 58.9세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인 81세보다 20년 이상 짧다. ‘이제 환갑은 챙기기도 남사스럽다’는 농담 섞인 말은 아직 소방관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원체 위험한 일을 담당하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과도한 업무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소방관의 삶의 길이를 시대와 동떨어진 수준으로 줄이는 이중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이들에게 20년 넘는 세월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돈의 빚이나 마음의 빚을 갚는 일도 녹록치 않은데 하물며 빚진 세월은 어떻게 갚아야 할까.
지난달 7일, 새로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국회에 추가경정예산안을 제출하며 소방관, 경찰관, 복지 공무원, 집배원 등 충원이 절실했던 공공부문 현장 중심의 인력을 확충하여 국민의 안전과 복지서비스 향상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국민의 안전, 복지, 나아가 민생을 보살피기 위해 국가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미이자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묵묵히 공공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에게 빚진 세월을 국가가 조금이나마 갚아나가겠다는 의미이다. 이번 추경이 일자리 추경이기에 앞서 ‘안전 추경’이자 ‘복지 추경’이며 나아가 ‘민생 추경’인 이유이다. 국민의 70% 이상도 이번 추경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 달 넘도록 추경안에 대한 심사조차 진행하지 않고 있는 국회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곱씹어야 한다.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編)에 나오는 역즉지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역지사지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의 입장을 고려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여당과 야당의 역할이 바뀌어 있던 지난 정권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도 국회는 몇 가지 사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서로의 다름이 교환된 자리는 어디까지나 논의의 장이었고 공론의 장이었다.
이번 추경도 마찬가지이다. 추경안에 이견이 있다면 심사의 장에서 밤을 새워 토론하고 합의점을 조율하면 될 일이다. 국회는 조속히 장외정쟁을 멈추고 추경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G20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외국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외국 정상과 우리 교민은 물론 현지인들도 일관된 정중함을 보였다. 이는 문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존경에 앞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향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민주주의의 후퇴와 자유의 제약에 맞서 촛불과 평화로 대응한 민주시민을 향한 표현이기도 하다. 추경 심사 거부로 민생마저 외면하고 있는 국회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지난 겨울 시민들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경청했다. 우리 사회는 뜨겁게 토론하고 설득했다. 한 단계 더 성숙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어가는 일은 이제 국회의 몫이다. 이번 추경안에 대한 전환적인 접근은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여당은 야당의 입장에서, 야당은 여당의 입장에서, 그리고 국회는 시민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논의하며 실천해야 한다. 이제 ‘역지사지’국회로 변모할 때다.
△소병훈 의원은 도서출판 산하 대표 등을 지냈으며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