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누명 벗은 아버지 곁으로 간 아들 애절한 장례식

"이제 우리 가족 조용히 살았으면…"

▲ 김제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최낙효씨의 빈소.

34년 전 김제 진봉면 고사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고(故) 최을호 씨와 조카인 낙전·낙교씨가 간첩 활동을 했다며 누명을 썼다. 을호 씨는 사형, 낙교 씨는 구치소에서 조사 도중 사망, 낙전 씨는 9년을 복역하고 석방 4개월 만에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법은 무죄를 확정했지만, 한 가족의 아픔은 최을호 씨 아들 낙효 씨(63)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12일 김제의 한 장례식장에서 34년동안 ‘간첩’누명을 썼던 가족들을 만났다.

 

“진실이 세상에 밝혀져 좋지만,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면서 정말 마음 아프게 살았거든요. 그래도 뭔가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누명을 벗고 고향에서 눈을 감았으니까요.”(최을호 씨 넷째딸 명숙 씨(58))

 

밤새 기적이 일어나 아버지 낙효 씨(63)가 돌아올까 봐, 그러면서 가족들이 “다 잠들었네”하며 서운해할까 봐, 12일 새벽 1시를 넘긴 시간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아들의 얼굴에 깊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세상의 관심을 피해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고통이 묻어났다.

 

미망인이 된 낙효 씨 부인 김 씨는 고통을 감추려는 듯 “운다고 (낙효 씨가) 살아 돌아오느냐”며 가족들을 다잡았다.

 

유족들이 마주 앉은 식사 자리는 “고추 볶음이 싱겁다”는 일상적인 짧은 대화가 전부였지만, 가끔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서울에서 비보를 듣고 내려온 낙효씨 여동생 명숙 씨와 성란 씨는 기도하다 눈물을 흘렸다.

 

“나를 봐서라도 꿋꿋하게 살아야지.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오빠 나중에 만나자, 그때 이야기 다 하고 한도 풀어요.”

 

영정 사진 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한 자매는 낙효 씨의 운명이 어쩌면 자신들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명숙 씨는 지난 9일 오전 10시 김제 선산에서 잠시 “담배를 사러 간다”는 말을 하고 사라진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오빠가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몸도 좋지 않은)오빠와 함께 괜히 선산에 올랐나 싶다”며 자책했다.

 

7남매 중 장남인 낙효 씨는 총명했다고 한다. 전주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걸었지만,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린 청천벽력같은 소식으로 교직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전근을 반복하다 퇴직했다.

 

요양병원에서 생활한 낙효 씨를 대신해 부인이 문구점을 운영하며 두 아들을 키웠고, 장남은 의사가 됐다.

 

원망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마을 주민은 유족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낸 우리를 원망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가족들은 “원망은 안 한다”고 답했다. 마을 주민들이 낙효씨 가족을 위해 16일 마을 경로당에서 열 예정이었던 위로 행사는 취소됐다.

 

가족들은 “이제 우리 가족이 조용히 살았으면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누명을 쓴 최을호·낙전·낙교씨와 장남 낙효 씨를 죽게 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