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십계명 - 고재웅

▲ 고재웅
요즘 노인네 모임에서 우스갯소리로 ‘노인십계명’이 회자되고 있다. 노인십계명은 노인이 최소한 지켜야 할 10가지 도덕적 계율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10개조의 계시를 풍자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허물없는 노인들 사이 흔히 술좌석에서나 하는 푸념이지만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나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현실에서 귀담아 들을 만한 경구이다.

 

‘노인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자식한테 효(孝)를 기대하지 마라’이다.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소위 반포지효(反哺之孝)는 이젠 머언 태고적 전설처럼 잊혀져 가고 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고이 기른 자식도 부모를 늘그막에 제대로 모시기는 커녕 귀찮게 여겨 현대판 고려장 호텔인 동네 요양원에 버리다시피 방치하는 세태다.

 

둘째 ‘남 앞에 자식 자랑 하지 마라’다. 옛말에 마누라 자랑하는 놈은 온병신이고 자식 자랑하는 놈은 반병신이라 했다. 사람의 길흉화복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그만큼 현재의 잣대로 자식을 남 앞에 치켜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남 앞에 아는척, 잘난척 하지 마라’. 나이 70이 넘으면 한때 잘나갔던 사람이나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나 그게 그거고 오십보 백보 처지다. 괜스레 힘주어 보았댔자 남이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만 외롭다.

 

넷째 ‘돈 있다고 자랑말고 뻐기지 마라’. 인생 80이 넘으면 돈 쓸래야 쓸 곳도 없고 맛있는 음식조차 갈수록 소태씹는 듯 하다. 돈이 억만금 있어도 얼마남지 않은 여생에 비추어 보아 몇푼 쓰지도 못하고 3평 남짓 땅만 차지한 채 귀소(歸巢)한다.

 

다섯째 ‘공공장소에서 목청 높이지 마라’. 허리는 꾸부정정, 걸음걸이도 휘청휘청, 눈은 침침, 귓속은 윙윙거리는데 왠 목청만 그리도 높고 요란한지 마치 자기집 안방인양 행세한다. 조용히 세상사를 음미하고 관조(觀照)하듯 여생을 즐겨라.

 

여섯째 ‘지난날의 화려했던 한 때를 내세우며 되씹지 마라’. “왕년에 그래도 내가 한 자리 한 몸인데 어쩌고 저쩌고…”하며 허세부리는 노인네일수록 별볼일 없는 친구다. 고매하고 훌륭한 인품의 노인은 어디서나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은은하게 지적(知的) 향기를 내풍긴다.

 

일곱째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노골적으로 빈자리를 노리지 마라’. 경로석이 마치 자신만의 전용석이나 되는 듯 승차하자마자 두눈을 두리번 거리고 좌석의 양보를 바라는 듯한 행동을 보이지 마라. 이미 앉아있는 사람도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을 터이다. 여덟째 ‘대중이 있는 장소에서는 일행 중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의식적으로 고위직 직함이나 교수, 박사, 장군 등의 호칭을 외치듯 부르지 마라’. 높은 직함을 부르는 것이 자기와 동일시하고자 하려는 심리적 발로일지라도 듣는 다른 사람에게는 거부감과 불쾌감을 자아낸다. 아홉번째 ‘자식에게 가진 재산을 몽땅 털어 넘기지 마라’. 재산을 자식한테 전부 넘겨주고 얹혀 살며 눈칫밥이나 얻어 먹고 쥐꼬리 만한 용돈이나 타 쓰는 처량한 신세를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열번째 ‘맡고 있는 공식적, 비공식적 직위를 모두 내려 놓아라’. 자기 소유의 기업체가 되었건 공공단체의 명예직 감투가 되었건 70세가 훨씬 넘은 노인네 입장에서는 다 부질없는 거추장스러운 자리다. 얄팍한 자리에 연민을 두고 붙들고 있는 것은 노추고 노탐이다.

 

구구절절 옳은 이 말을 그리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주책없는 고질병이다. 새삼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라는 고은 시인의 짧은 시문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된다. 이제라도 인생 마지막 황혼길 아름답게 장식하자.

 

△ 고재웅 씨(78)는 부안 출신으로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공직에 입문해 제주와 군산, 여수해운항만청장을 지냈다. 주요 일간지에 다수의 칼럼을 게재했고, 고향인 부안지역 주간신문에서는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