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병원에 가야해

무언가 잘못 되기 전에 내가 강하지 않다는 걸 내 스스로가 마주해야

▲ 권화담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2학년

친구들과 놀러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뒤늦게 내가 버스를 놓쳤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도 버스는 40분 째 오고 있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매우 슬픈 일이 생긴 것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몸이 떨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함께 놀러가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애인은 40분 걸리는 거리를 찾아와주었다. 애인이 버스 정류장까지 오는 동안 울음은 조금 멈추었지만 떨림이나 힘이 빠지는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지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애인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몸을 집으로 옮길 수 있었고 밤 아홉시가 되어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진정되고 다시 생각해보니 ‘단단히 잘못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가 한 만큼 몸에게 다시 되돌려 받는 것 같았다. “나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애인은 해야 하는 일을 줄줄 읊는 나를 말리고 밥을 먹였다. 열심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좋지만 몸에 무리가 온 것 같다며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애인이 집에 가고 나서, 일찍 잠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 대로 얌전히 잠들었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일 생각을 떨치지 못했고 핸드폰의 카카오톡 회의 내용을 다시 읽었다. 지금 글을 쓰는 전북일보 원고를 포함해서, 여러 행사와 맡은 역할들을 해야 했다. 아- 언제 하지, 하면서도 확실히 피로했는지 눈이 감겨졌다.

 

예전에 누군가는 내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죽을 줄 알았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그러다가 죽는 거 아니냐고 했다. 설마 이정도로 죽을까, 하고 웃어 넘기고 있긴 하지만, 애인의 눈빛을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가끔은 이러다 비참하게 죽으면 어쩌지 걱정이 되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도 했다. 즐거운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즐거운 일을 한다고 해도 지금 몸 상태라면 비참하게 죽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죽음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죽기엔 이르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아직 다 못 끝낸 미련이 들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 비록 내가 해야만 해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어떻게 라도 끝은 내고 싶었다. 끝을 내고 나의 결과물로서 받아들이고 싶었다. 많은 일로 힘들 때 버텨야 하는 이유는 일 때문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역설적이었다.

 

병원에 가긴 가야지,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의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주 슬프게도 이 사람들에게 느끼는 고마움 때문만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끝까지 보여야할 내 모습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기 보다 나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 갈 것이다. 동시에 내가 약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해서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진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병원에서 나를 약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정말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 되기 전에 내가 강하지 않다는 걸 마주해야한다.